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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하던 보노보노 Feb 10. 2024

운명이 이끄는대로

새해에도 여전히, 지독한(?) 운명론자의 삶

 2024년의 초입에 이직 및 이사를 앞두고 나는 언제나처럼 찾고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구인공고를 모조리 둘러보며 내 마음을 가장 동하게 하는 운명의 새 일감을.


 워낙에 연고 없는 지역에 가서 새로 뿌리내리고 사는 일에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게 타고난 성격인 데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이유도 하나 없는 자유로운 처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계획에 전혀 없으나 만약, 언젠가 내게도 함께 거주해야만 하는 인생의 동반'자(者)'가 생겨버리고, 그가 한곳에 뿌리내려 살아야만 하는 성미(또는 직업적 한계)를 가진 자라면, 더는 못 하게 될 선택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더욱 마음껏 누리는 중인 일종의 방랑생활이다.

 어느새 지금의 이 바닷마을에 얕은 뿌리를 내려기 시작한 지도 3년차. 그나마 나를 이곳에 붙잡아둘 무엇이라곤 고작 2년짜리 전세계약이 전부였기에, 계약 만료 시점이 다가오자 슬슬 운명이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런지 궁금해하는 참이었다.


 애초에 난생처음 이곳에 와 지내기로 마음 먹게 된 유일한 이유였던 -전국 최고수준의 예약율을 자랑하는 곳이니만큼 배울 점이 아주 많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많이 배웠던- 숙소에서 1년여. 이후 건강상의 문제와 함께 갑작스레 닥친 재정적 난관, 그리고 단 한 명이었지만 어쨌든 함께하던 동료의 비이성적 행태를 더 이상은 견디기 싫음(!) 등의 이유로 아쉬움을 남긴 채 그곳을 퇴사한 뒤에는, 지금의 호텔에서 1년여를 일했다.

 이 호텔로 말할 것 같으면 마찬가지로 난생처음 '진심으로 일해보고픈 마음이 동하는 곳'이 아니라 '제한된 선택지 중에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일해본 경험을 준 곳이다. 물론 그런 선택이었다고 해서 완전히 나쁘지는 않았다. 썩 대단히 만족스럽지도 않았지만, 아주 다 나쁘지도 않았다. 꽤 좋은 추억들도 쌓았고, 또 겪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인생 경험치가 늘었다 여길 수 있을 만한 일들도 어렵게, 하지만 결국엔 잘, 흘려보냈다.


 뭐가 됐든 이제는 슬슬 인생의 다음 챕터를 열 때가 다시 도래했다며 이직을 준비하던 중 나는 내 마음을 강력하게 잡아끄는 청년사업가의 열정어린 사업체를 찾게 되었다. 오너의 마인드며 제시하는 비전까지 모두, 한마디로 '황홀'했다. 단순한 구인글을 넘어서 구구절절 풀어놓은 기업에 대한 안내이자 홍보와, 자신들이 갈망하는 인재상에 대해 꼼꼼히 읽으며 '나와 아주아주 잘 맞는 곳이겠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런 확신이 들게 하는 글을 만난 적이 몇 번이고 있었고, 그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기에 곧바로 이미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지원서를 제출하기도 전에 근처 전월세 시세를 싹 훑었다. 내친김에 믿음직해 보이는 부동산을 택해 문의도 넣어두었다. 그런 뒤에야 밤을 꼬박 새워 지원서를 제출하자 아니나 다를까 이내 서류합격 내용과 함께 면접 일시를 조율하기 위한 문자를 받았다.


 시작은 그렇게 아주 순조로운 듯했다. 모든 것이 예비된 길인 양 느껴졌다. 그런데 면접일정을 확정짓는 문자에 마땅한 답변이 오지 않았다. 연휴가 시작됐으니까, 또는 연휴에도 쉬지 않아 바쁜 곳이니까? 왜 납득할만한 답장이 오지 않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기다리다 다음 날이 되었다. 내쪽에서 한 번 더 문자를 보내보았다. 말씀하신 날짜와 시간에 면접 보는 것이 확정된 게 맞는지 물었다. 맞겠거니 하고 우선은 차편을 예약해둔 상태였다. 그래도 왕복 6시간에 15만원의 비용이 드는 일정이니 확답을 다시 한 번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답장이 없었다. 꼬박 48시간이 지나고 또 5시간이 지나도록. 언급한 면접시각이 바로 18시간 앞으로 다가오도록.


 그 사이를 비집고 운명처럼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나를 처음 이 지역으로 이끌었던 일전의 숙소에서 새롭게 구인을 하고 계신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의 호텔에서는 언제까지 근무할 생각인지, 혹시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는지 물으신 것도 벌써 한참 전이었다. 하지만 당시 퇴사를 결심하게 했던 요소들에 여전히 변화는 없을 거라 여겼기에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던 터였다. 그런데 상황이 꽤나 달라졌다는 소식과 함께 재고해봄직한 제안이 새로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구직상황과 심경 및 재입사 시 희망 재직조건 등에 대해 빠짐없이 공유드리자, 바로 내일까지 조율해서 확정짓자는 말씀을 주셨다. 가려는 곳이 어디든 얘는 그 면접 못 간다고 대신 연락이라도 해두시겠다는 우스갯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그러자 그제서야 그 청년사업가의 업체로부터 확정문자가 도착했다. 문자 발송에 실패한 걸 이제야 확인하는 바람에 연락이 늦어 죄송하며 내일 예정된 시각에 면접을 진행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라는 운명론자는 이런 순간에 흔들린다. 어떤 계시일까? 왜 그럴싸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일이 잘 흘러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래도 아쉬웠다. 익숙한 곳에서 좋은 조건에 편안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코앞에 두고도 따로 아쉬워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tmi를 남발하며 솔직한 현 상황을 공유했다. 일면식도 없는 구직자와 구인담당자 사이에 다분히 알고 싶지 않을 구직자의 개인사정일 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그쪽에서도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면 내일 내쪽에서 다시 면접과 관련해 연락드려도 될지를 묻는 답장을 보냈다. 


 운명이 나를 또 어디로 이끌지 나는 아직 모른다.

 어쩌다 보니 음력 일월 초하루부터 많은 것이 결정되려 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라는 운명론자는 내 인생이 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최대한 관망해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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