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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하던 보노보노 Feb 17. 2024

운명이 이끄는대로_2

중요한 결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법

마련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정이 들어버린 단촐한 데스크탑 공간.

 이 방에서 지내온 수천 시간 중에서 이 책상이 함께한 시간은 채 몇백 시간 밖에 되지 않는데도, 아마 이 방을 떠나고 나면 가장 그리워질 장면 중 하나가 이 장면이 될 것 같다.


 '시간'이란 참 신기하고 놀라운 존재다.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이미지를 그려 보자면 내게 시간이란, 돌이킬 수도 붙잡을 수도 없이 쏟아져내리는 폭포수를 그저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어떤 이의 뒷모습이다.


 언제나처럼 운명의 흐름을 관망하기로 한 뒤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3월부터 지낼 곳이 확정됐다.

 결국에는 이전 직장, 약 1년 전에 떠나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직장과 이미 떠나온 전 직장, 두 선택권 사이에 여러 쟁점이 있어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결정했고, 그리 흐르는 편이 내면을 꼼꼼히 살폈을 때 더 자연스럽다고 느껴졌다.

 애초에 그곳에서 퇴사하기를 결정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셋 중 무엇 하나 비중이 더 적거나 많지 않고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요통으로 인한 업무수행능력 저하, 최저시급에 준하는 급여와 긴 근무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개인사정, 함께 근무하던 동료 중 한 명과의 불화가 있었다. 그래도 단순히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넘어 인간적이며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인성을 지니신 사장님이 계셨기에, 그 모든 사유에 대해 충분히 섬세한 대화와 해결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쉽게 해소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종국에는 사장님께서도 내 결정에 나름대로 납득을 해주셨고, 그러므로 퇴사 과정에서 별다른 불화는 없었다.

 이후 곧바로 이직한 지금의 호텔과도 물리적으로 오가는 일이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기에 몇 차례고 손이 부족한 날에 일을 도우러 가거나, 회식날 불러주시거나 하는 등 상호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던 터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내가 아예 이 지역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려고 한다며 인사를 드릴 겸 안부를 전하면서 재입사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당연히, 사장님께서도 나를 다시 부르시는 데에는 종전의 퇴사사유를 해소시켜주실 용의와 상황이 갖추어졌다 여기셨을 일이었다.

 우선 요통 문제는 근무파트 자체가 이전과는 달리 허리에 무리가 거의 가지 않는 파트에 티오가 난 셈이라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되었다. 둘째로 급여 또한 -월급 50만원 인상이라는- 나름대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주셔서 어느정도 해소되는 동시에 근무시간도 다소 줄여주시기로 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세 번째 이유가 남았으니, 바로 불화가 있던 동료가 여전히 재직 중이라는 점이다. 그 '불화'란, 이곳에 구구절절 기록하기에도 다소 언짢은 것들인데, 순전히 내 입장에서 간단히 말하자면 주로 해당 직원분의 무례한 언행으로 인해 벌어지는 불편한 상황들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혹시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자세히 남기기로 하고, 어쨌든 그 부분은 '사람이란 쉽게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해소되기가 영 어려울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품어보자면 이미 서로 대차게 부딪혀본 적이 있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쿨다운 시간도 1년이나 가졌기에, 서로 더 조심하면서 새로이 잘 지내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 반, 그래도 안 될 이유가 딱 그것 하나뿐이라면 한 번은 더 시도해보자는 생각이 반. 고민할 시간을 가지자면야 내게는 한 달도 너끈히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사장님께 배웠던 여러 삶의 지혜 중 하나인 '빠르게 결단을 내린 뒤, 뒤돌아보지 않고 결정한 바에 책임지며 앞으로 나아가보기'를 발휘해보기로 하여 딱 이틀만 고민을 하고 결정을 내렸다.


 실은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되는 데에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스쳤다. 하지만 감당해보리라고 결정한 이상,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내게 자꾸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을 언제까지고 피하고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자는 '그런 게 사회생활'이라고 할지도, '그런 게 인생'이라고 할지도 모르기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보겠다.


 그리하여 이 기숙사에서 보낼 시간은 앞으로 고작 열흘 남짓.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서 마치 평생 이곳에서 지낸 사람마냥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곤 하는 보금자리였는데…. 막상 곧 떠나야 한다 생각하니 꽤나 서운하다. 퇴사는 하고, 월세를 따로 회사에 지불하며 이 방에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그래볼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방에서 지내는 동안 겪었던 일생일대의 아픈 밤이나 웃고 울었던 수많은 시간들도 모두, 일정 부분 이 공간에 봉인되어 남겨질 테다. 잊고 싶은 기억도 있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고픈 순간 또한 있음에도, 어찌할 도리 없이 그럴 테다.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하기를 결정한 순간, 그 순간의 선택을 내리기까지는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었다. 그때 그 선택으로 인하여 지난 1년여의 시간이 여기까지 이렇게 흘러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의 13개월여를 이곳에서 지내게끔 한 그때의 선택을 돌이켜보는 지금, 마냥 후회스럽지는 않아 다행이다. 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고 익히게끔 해준 선택이었다. 여전히 '이미 아는 것'보다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금 선명하게 바라보게 해준 선택이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운명론자에게 '잘못한 선택'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모든 선택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골고루 있기 마련이고, 그중에서 밝은 면에 더 집중하기를 선택하는 게 나라는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 매 결정이 잘못한 선택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부디 오지 않기를 매번 새삼 바라왔던 것도 같다. 삶이 나에게 건넬 '이번의 배울 점들'을 의연하게 마주하고 배워내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다 뭐… 좀처럼 잘 해내지 못한 것 같이 생각되는 순간이 온대도 또 괜찮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마저도 그 언제나처럼 공평하게, '시간'은 흘러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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