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명함

'에듀플래너' 이현정

by 이현정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해질 때쯤 아이를 돌보는 일도 제법 능숙해졌습니다. 딸이 백일 무렵 몸을 움직이며 눈 맞춤하고 반응하는 모습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아에서 강조하는 내용 중에 엄마와 아이의 상호작용에서 책 읽기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딸이 백일무렵 출판사에 다니는 지인에게 처음 책을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당시 남편 한 달 월급 정도 되어서 부담되었지만 아이를 위해 구매를 결정했습니다. 남편하고 상의하지는 않고 책을 계약해서 도착한 날이었습니다. 퇴근하고 온 남편이 문 앞에 있는 책을 보더니 물었습니다.

책이 왜 이렇게 많아? 얼마야? 상의 좀 하고 사지.


저는 사실대로 말하면 잔소리할게 뻔해서 적당히 둘러댔는데 남편이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아직 글도 모르는 아이에게 책이 꼭 필요해?
반품하고 서점에서 한 권씩 사주면 안 돼?



미리 상의하지 않은 것은 서운할 수는 있겠지만 반품하라는 얘기는 예상외였습니다. 본인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 아이에게 책을 사주는 걸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강경한 태도로 반품을 원하는 남편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돈을 버는 입장이 아니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살던 터라 지인에게는 미안해도 책을 반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를 위해 산 건데 그런 말을 들으니 억울하고 불편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사던 일일이 상의해야 하는 건가?’ 생각하니 좀 치사했습니다.


책 반품 사건을 계기로 경제활동을 안하는 게 왠지 스스로 위축감이 들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책이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집에만 있기보다 다시 직업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 후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남편도 내가 아이와 본인만 바라보면서 시간을 지내는 것보다는 아이를 맡기고 짧은 시간이라도 나를 위해 공부를 하거나 경제활동을 함께해서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너무 적극적으로 하라고 했으면 오히려 조금 싫었을 수도 있는데 모든 선택은 저에게 맡겨주었습니다. 책 살 때만 빼고요. 아마도 가장의 무게가 크니까 둘이 벌면 부담이 덜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를 맡기고 일해보려고 구직을 시작했습니다.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미술학원이나 방문미술 학원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하려면 어린이집비용과 출근하면서 생기는 기본적인 지출비용이 컸습니다. 미술학원 강사나 방문미술선생님 급여로는 워낙 박봉이라 아이를 맡기고 나가서 일을 해도 남는 돈이 없었습니다. 힘들게 일하고 아이보육비로 다 들어가니 돈을 버는 의미가 없을 정도 였습니다.


몇 개월간 고민하면서 구직을 하고 있는데 지난번 책을 구매했다가 반품한 지인께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가 조금 컸으니 함께 일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였습니다. 마침 구직을 하고 있던 터라 좋은 제안에 지인이 팀장으로 있는 출판사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와 함께 출근해서 일을 좀 배우고 적응이 되면 어린이집에 보내도 된다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좋은 제안이기 했지만 제 성격상 세일즈는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와 할 수 있는 일의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지인을 믿고 일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거리가 매우 가까운 곳이라 출퇴근에 부담이 많이 없었고 가장 좋은 점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육아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적응이 될 때까지 아이와 함께 출근할 수 있어서 더욱 맘에 들었습니다.


나도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조금은 설레었습니다. 출판사라서 책이 많기 때문에 아침마다 도서관에 간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 함께 출근하였습니다. 남편이 출근하면 집에서 아이와 단둘이 놀거나 자거나 하는 지루한 일상에 갈 곳이 생겨 참 즐거웠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딸의 이유식 도시락을 챙겨서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주차장이 작아서 차를 탄천 변에 세우고 딸을 카시트에서 유모차로 옮겨 태워 한참을 걸어가야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주말이면 딸의 이유식 도시락 준비할 장을 봐서 냉동실이 차곡차곡 정리해 놓고 매일 다른 반찬으로 이유식 도시락을 싸갔습니다. 국장님께서는 아이들 이유식인데도 참 맛있다며 칭찬해 주셔서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후 팀장님께서 명함과 스티커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에듀플래너 이현정’

이 명함을 받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예전에 일하던 미술학원에서는 명찰을 착용해서 명함은 처음이었습니다. 첫 명함이라 기분도 좋았지만 왠지 책임감과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명함을 받고 첫 명함은 남편에게 주었더니 저보다 더 반가워했습니다. 집에서 본인만 기다리면서 아이와 징징대던 내가 직장에 나가면서 생기가 있고 밝아지는 것 같다며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하라고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집과 회사에 내편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어느 날은 근처 아파트 장에 홍보 이벤트를 나갔습니다. 열심히 명함도 돌리고 교육전단지도 나누어주었습니다. 마침 학습지에 관심이 있었던 1학년 엄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1학년 아이의 진단을 하고 팀장님은 엄마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당일 어머니께서 학습지 계약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첫 계약이라 계약서를 내미는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틀릴까 봐 바짝 긴장해서 계약서 작성을 하였습니다. 계약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 떨림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성공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인연이 생기다 보니 두렵기만 하던 일이 점점 익숙해지고 적응이 되어가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세일즈가 어려운 것만은 아니구나.’ 그렇게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가슴이 설레는 직장을 만났습니다.


‘자신만의 일’은 새로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자 가장 ‘나다운 일’이다. 나다운 일은 내가 열정이 있고 뿌듯한 만족이 느껴지는 일이다. 아무리 몸이 고되고 힘들어도 나에겐 의미가 있는 일인 것이다 과정 자체를 즐기는 모습은 있는 그대로 빛이 난다.
김수영,『엄마의 두 번째 명함』, 미다스북, 2022


주위에서 내성적인 제 성격을 아시는 분들은 ‘왜 하필 세일즈를 하냐?’라고 종종 물어봅니다. 저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하는 만큼 성과를 낼 수 있는 보람된 일이라서 만족한다.’라고 얘기합니다. 일이 무엇인지는 보다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욕심 내지 않고 내가 아이를 돌보며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8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있으니까요. 그렇게 엄마가 아닌 ‘이현정’의 명함으로 아이와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퇴사 후 지금도 새로운 명함을 꿈꿉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요. 이현정이라는 이름으로요.

여러분은 어떤 명함을 갖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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