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연금술사
지난주 일요일 새벽 5시 반 눈이 번쩍 떠졌다. 화요일 자정까지 마무리해야하는 글쓰기과제 때문이다. 글감을 찾아 추억상자에서 하얀 꾸러미하나를 꺼냈다.
대학시절 편지들이다. 고등학생 시절엔 수능을 치고 대학생만 되면 어른이 절로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왜 공부해야하는지, 나는 누구인지는 모른 채 그저 눈과 머리로만 공부를 했다. 재미가 없었다. 적당히 공부를 했기에 수능성적도 딱 그만큼 나와서 지방국립대 사회복지학과를 갔다.
집이랑 한 시간 거리였는데 부모님 곁을 떠나 자유를 만끽해보고 싶어서 자취를 하겠노라고 우겼다. 그렇게 같은 과 언니와 학교 앞 옥탑 방에서 첫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3900냥 고기집 건물 4층, 3평 남짓의 방에 싱크대가 있는 원룸이었다. 챙겨온 짐을 정리하고 필요한 것은 그날 구입해서 살림을 장만했다. 부모님의 차 뒷모습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며 들던 묘한 해방감과 막막함이 아련히 떠오른다.
주말이면 집에 들러 반찬을 얻어오고, 밥은 해서 먹거나 외식을 했다. 빨래는 공용화장실에서 세탁기를 사용하였고, 씻다가 갑자기 차가운 물 아니면 뜨거운 물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던 날들이 있었다. 한 칸짜리 냉장고에선 물이 자주 얼어서 물통이 깨지곤 했고, 집 앞에서 생전 처음보는 큰 바퀴벌레와 한참을 마주 서있다 후다닥 집으로 들어갔던 날도 있었다. 새벽이나 밤이면 화장실 가기가 무섭고 또 귀찮아서 얼마나 참았던지. 3평 남짓한 방에서 두려움과 공허함을, 이따금씩 아늑함을 느끼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하얀 꾸러미 속에는 과친구들, 풍물패와 학생회 선후배들, 휴학시절 지인들로부터 받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보니 소나기가 지나간 캠퍼스의 초록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 푸름에 취해 참 행복했다.
20대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달라졌나 가만히 돌아본다. 여전히 호기심 많고, 웃음소리 유쾌하고, 문장 수집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그 사이에 나는 대안학교 길잡이교사로, 기업교육 강사와 영업일을 하게 됐다. 인천태생 남편을 만나 인천댁이 되었고 두 번의 출산과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다섯 살 터울의 두 딸 맘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이 덕에 많이 웃고 좌절하고 또 감동받고 함께 자라면서 나는 경력단절여성 10년차가 되었다. 출산 후 두 번의 산후우울증 덕에 살아보려고 배운 캘리, 타로, 코칭이 지금의 나에겐 새로운 꿈이 되었다.
언젠가 삶이 우리를 모질게 만들려고 할 때 기억해야 할 격언이 있다. ‘이것은 불운이다’가 아니라 ‘이것을 훌륭하게 견디는 것이 행운이다’_ 아우렐리우스
20년 뒤의 나는 또 여러 경험을 하며 내 삶의 연금술사가 되어 있을테다. 주변에 좋은 벗들을 잘 챙겨가며 맞이할 60살의 나에겐 총천연색의 사람꽃이 흐드러지게 다양한 국적으로 피어있길 소망해본다. 나를 편안하게 받아들인 만큼 또 다른 나인 당신의 색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너른 품의 어른이길! che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