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댁의 행복찾기
2023년 겨울이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습지에 가는 날이 뜸해졌다. 오랜만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발걸음은 습지가 아닌 소래포구로 향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소래포구 어시장을 처음 가본 건 지금 아파트로 이사 오고 2년 뒤쯤 지인의 방문 덕이었다. 평일 오전의 어시장은 한산했음에도 각종 튀김과 막걸리, 전, 코코넛쥬스와 아이스크림 호떡에 번데기까지 다채로운 먹거리들이 관광지의 색을 더하고 있었다.
생선구이 냄새가 진동하는 건어물 코너를 따라 들어가면 젓갈, 회, 조개류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다. 처음 접하는 낯 뜨거운 호객행위와 수조 속 물고기의 파닥거림에 놀라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 우리는 소래철교로 발길을 돌렸다.
1937년 일본이 소금수탈을 위해서 수인선 협궤열차와 소래철교를 같이 만들었다. 소래철교는 1992년까지 이용했는데 1997년에 인도교로 개조하여 시흥 월곶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되었다. 긴 철교의 한가운데에는 반투명하게 아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그 자리에서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춘 듯 묘한 평화가 찾아왔다. 날아가는 갈매기는 세상은 넓으니 맘껏 펼치고 살아보라며 한마디 보태고 꽤 오래 가만히 서있는 왜가리는 무엇을 하기보다 네 안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얘기해주는 듯하다. 어느새 내 맘도 따라 조용해졌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보니 수협에서 경매하는 모습이 보인다. 새벽의 습지와는 또 다른 치열한 삶의 현장에 와있으니 생생한 활기가 느껴진다. 아침이라 아직 가게들은 문을 열지 않아 대낮의 호객행위들이 꿈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라, 코끝으로 바다비린내가 진하게 났다. 순간 '이 냄새 어디서 맡았더라?' 하는 질문에 이어 바로 떠오른 답. '강원도 태백의 외할머니 생선가게 냄새다!'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 작은시장에서 외할머니는 생선가게를 하셨다. 엄마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생선가게를 하는 게 부끄러웠다고 했다. 나도 다소 어둡고 외할아버지의 담배 쩐내와 소주냄새가 배어있던 외가에 가기 싫었다. 그뿐인 줄 알았다.
대학 때 학생상담이란 교양수업을 들었는데 교수님이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처음엔 코웃음을 치며 하나라도 기억날까 했는데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감고 있자 두 장면이 떠올랐다. 하나는 할머니의 장례식 날 꽃상여였고 또 다른 하나는 외갓집 큰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였다.
1986년 5월말 두 살 터울로 내 동생이 태어날 예정이었는데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태백의 외갓집으로 가게 됐다. 휴게소에서 먹은 아이스크림이 탈이나 장염으로 몇 날 며칠을 고생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생이 황달이 걸려 입원 기간이 더 길어졌다. 3살이 감당하기 벅찬 분노, 두려움, 슬픔, 수치심을 안고 그 작은 아이는 내 맘 한 켠에 꽤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첫 아이를 낳고 회음부 4도 열상으로 목동이대병원에 16일을 입원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재수술 준비를 했다. 당시 직장을 다니던 엄마가 한달여의 휴가를 얻어 나를 극진히 돌봐주었다. 첫손녀를 보러 올라왔다가 산부인과에서 회음부 재봉합수술을 했는데도 염증이 가라앉지 않자 휴가를 더 얻어 대학병원으로 함께 온 것이다. 그렇게 병원에선 보름이 넘게, 퇴원 후에는 일주일 동안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몸도 마음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긴 여정을 함께한 엄마와 서로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지막 밤,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우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지나간 일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 믿어본다. 이미 흘러가버리지 않았는가. 함께 있지 못한다하여 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을. 어느덧 엄마가 된 내가 엄마의 보살핌을 통해 치유되고 다시 웅크린 작은 아이에게로 향한다. 불현듯 돌린 발걸음과 코끝의 진한 바다비린내가 그날의 뜨거운 울음 속 사랑을 상기시켜 주었다. 덕분에 이제 나는 나의 집으로 간다. 소래포구, 이곳이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