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야마, 우연과 계획의 조화로운 여행
마쓰야마 여행기: 느림의 미학을 배우다
2025년 6월 1일-5일 여행기록을 남긴다.
1일 차 – 시간이 머무는 곳에 첫 발을 디디다
조용하고 느긋한 도시, 마쓰야마. '느슨한 스케줄로 넉넉한 시간을 잡아둔 여행, 그래서 더 기대된다'는 마음으로 친구와 나는 저녁 무렵 공항에 내렸다. 짐을 풀자마자 향한 곳은 마쓰야마의 상징 같은 ‘도고 온천’이었다. 시내에서 5번 트램을 타고 10여분 가니, 100년이 넘는 시간의 흔적이 겹겹이 묻은 그곳엔, 스튜디오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배경의 실제 모델이 된 도고 본관이 우뚝 서 있었다. 벳푸나 유후인과 달리 노천탕 하나 없고, 웅장한 자연뷰도 없지만, 거대한 산 같은 몇 겹의 육중한 건물, 낡은 나무의 결과 오랜 시간을 머금은 듯한 웅장함이 압도하는 공간이었다. 해가 지며 노을 속에 잠긴 그곳을 보고 싶어 한 시간가량 바깥을 서성이며 설렘 속에 하늘과 어우러지며 변화해 가는 모습의 그곳을 감상한다. 그리고 한국인 여행객에게 무료로 준 쿠폰으로 별관에서 목욕을 하고,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는 길. 유카타를 입고 상점가를 도는 엄마와 어린 딸아이의 정겨운 뒷모습과 함께 따뜻하게 켜진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생각했다. 낯선 도시에서 온천욕 후 맞는 시원한 밤바람처럼 완벽한 여행의 시작이 또 있을까.
2일 차 – 우치코에서 만난 시간여행과 따뜻한 마음들
아침 5시 반, 낯선 곳이어서 일까 일찍 눈이 떠졌다. 동네 러닝을 도전했다. 3km 달리기. 마을의 하천변을 따라 뛰다가 잔디밭에 나와 체조를 하던 동네 어르신들 사이에 끼어 우리도 따라 해 봤다. 낯선 곳에서 함께한다는 기분, 낯선 곳에서도 일상은 연결된다는 느낌이 묘했다. 세상의 소음보다 먼저 일어나 나만의 리듬으로 연 하루. 아침부터 이리 부지런하면 오늘 하루는 얼마나 꽉 차려나?
러닝 후 샤워를 마치고 마쓰야마성으로 향한다. 마쓰야마성은 기존의 성들과 달랐다. 일단 흰 회벽에 검은색 나무로 벽들과 지붕이 만들어진 것이다. 블랙 앤 화이트. 나무가 어째서 검은색이지? 챗 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숯과 약품처리를 해서 검은색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남다른 위용을 보이기에도 좋지만, 방수와 방충, 방화에 훌륭하다고 한다. 마쓰야먀성은 산 위에서 높은 돌 축대를 쌓아 세워두어서 천해의 요새 같은 느낌이다. 누군가 쳐들어오면 방어를 위해 내다볼 망원경 같은 구멍 벽도 만들어 두고, 벽을 타고 오르는 적에게 돌을 떨어뜨리는 곳도 있다. 다 돌고 보니, 이곳은 마치 ‘검은 갑옷을 입은 무사’ 같은 느낌이다. 겉은 단단하고 묵직하지만, 안에는 지혜와 실용이 담긴 구조라고나 할까? 임진왜란부터 역사를 거스르면 결코 찬양하고 싶지 않은 곳이나, 우리의 수원성과 비슷한 구조에, 산 꼭대기 요새 같은 성을 만든 과학적 접근은 놀랄만하다.
마쓰야마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도미밥을 점심으로 먹는다. 이곳의 바다 물살이 빠르고 조류 변화가 심해 도미살이 쫀쫀하고 탱탱해서 유명하다고 한다. 음~~ 맛있었다. 신선한 도미를 계란 간장 물에 풀어 덮밥으로 먹는데 어찌 맛있지 않을까나. 여기에 도고 맥주까지 한잔 곁들이니… 정말 좋다. 특히나 도고 맥주는 기대 이상의 맛. 어찌나 맛있었는지 다음날 종류별로 3병을 사들고 가 한자리에서 다 마셔 버렸다.
디저트로 수도꼭지를 틀어 마시는 귤 주스도 한잔하고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의 우치코(内子)로 향했다. 에도시대 목랍(목초) 생산으로 번영했던 마을이다. 지금은 고요한 고택과 전통 가옥들이 그 시절의 영화를 증언한다. 한 걸음씩 들어설 때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새벽부터 러닝을 하고 배도 부른 우리는 기차에서 잠에 골아떨어졌고, 도착하자마자 커피가 필요해 ‘덴지로(天時郎)’라는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70세가 넘은 듯한 주인장의 이름을 건 그곳. 직접 블렌딩 한 '덴지로 스페셜' 커피 정말 맛있었다. 그 시골에서 기대할 수 있는 커피 맛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커피를 연구하고 정성을 들인 맛, 훌륭했다. 독특하게도 차가운 단팥죽이 있길래 시켰더니, 통통한 경단이 셋 들어있고, 맛있었다. 단팥죽의 미숫가루 컨셉이랄까? 주문하지도 않은 전통과자를 서비스로 주는 덴지로 씨. 음악, 공간, 커피 그리고 환대. 다음에 또 오고 싶게 참 따뜻했다. “이렇게 덴지로 씨처럼 나이 들어감이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미하가 저택(上芳我邸)에서는 당대 목랍 재벌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정원과 규모에 놀랐지만 무엇보다 실내에 설치된 푸세식 화장실이 인상 깊었다. 그 시절 냄새나는 변소를 집 안에 둘 정도였다면, 그만큼 관리할 인력과 부가 뒷받침되었다는 뜻이었다. 어린 시절 푸세식 변소를 생각해 보면 실내에 있다는 것이 상상이 안되는데…. 부잣집의 포스가 느껴졌다.
우치코를 오느라 1일 산책패스를 비싸게 샀는데(인당 4만 원) 피곤도 하고 비도 와서 오즈성은 패스하고 마쓰야마로 돌아오기로 했다. 패스가 너무 아까웠지만 도고비어' 한 병, '도미덮밥' 한 그릇, 공기 좋은 마을길 한 바퀴. 덴지로 커피, 그것이면 충분히 잘 쓴 하루라 위로하며 너무 아까워하지 말자 다독인다.
그러면서 오카이도 상점가를 돌다 우연히 들어간 작은 이자카야, "치킨조지(ちきん ジョージ)"
비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불빛과 구운 닭고기 냄새가 반겼다. 카레 한 접시, 에다마메 한 그릇, 도미회 한 접시, 닭튀김 바구니, 통마늘구이, 고구마튀김까지, 안주로 파티를 벌일 정도에 맥주잔만 한 큰 잔으로 사케를 주문했다. 댓 병을 들고 와 넘칠 만큼 사케를 가득 따라주는 이 집의 넉넉함에 마음이 푹 풀어진 탓일까? 서로의 삶을, 선택을, 고단함을 친구와 나누다 보니 기분이 좋아 자꾸만 한 잔 더를 외쳤다. 두런두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속에... 그 큰 사케를 4잔이나 마시고 취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받아 든 계산서가 비싸서 놀라긴 했지만… “이 밤은, 그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다"라고 생각했다. 포기한 오즈성과 해변, 아까웠던 산책 패스... 그에 비할 바가 아닌 멋진 저녁이었다. 계획한 관광도 좋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진행'이 여행의 결을 바꾸는 것 같다. 숙소로 돌아가는 밤길, 술에 취한 우리는 함께 껴안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 밤이 참 좋았다. 우리들의 대화로 더 진해진, 깊고 행복한 밤이다.
3일 차 – 비의 리듬 속에서 찾은 여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천천히, 부드럽게, 모든 것을 적시는 빗방울. 우리는 우비를 입고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반수이소(萬翠荘)를 향했다. 1922년 구 마쓰야마 번주가의 별장으로, 일본 근대사가 서구에 품었던 동경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건물보다 인상적인 것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정원이었다. 그 한가운데 자리한 정원 카페에서 만난 두 마리의 고양이는 마치 이 오래된 집의 주인인 양 우리 곁을 맴돌았다. 특히 한 녀석은 우리 가방 위에 자연스럽게 앉아 새근새근 거리며 떠날 줄 모른다. "냥이 너, 사람 볼 줄 아는구나." 커피와 빗소리를 함께 듣는 고양이와의 시간이 참 정겨웠다.
점심에는 오카이도 거리에서 가벼운 우동 한 그릇으로 몸을 데우고, 빗속 관광보다 미츠코시 백화점과 돈키호테 쇼핑을 선택했다. 미츠코시 백화점 내 '슬라이스 오브 라이프'와 '해피플러스' 같은 편집샵들을 보며 마쓰야마가 작지만 세련된 도시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 우리는 “노멜(NOMEL)”이라는 바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되는 곳.
가게 이름은 NOMEL. 레몬(LEMON)의 거꾸로 쓴 이름이다. 주인장의 시그니처 메뉴는 'Cloudy 레몬 사워'였다. 역시 레몬이 주인공이다. 막걸리 같은 부드러움과 레몬의 상큼함, 주먹만 한 얼음이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었다. 다찌 스타일로 두 자리밖에 없는 이 작은 공간에서 주인장은 각국 언어로 "한 잔 하고 갈래요?"라고 쓴 종이를 흔들며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았다. 저녁 전후로 두 번이나 찾았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어스름 무렵 방문할 때는 손님이 우리 밖에 없어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인스타도 구경하고 사진도 함께 찍고 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식사 후 늦은 밤 다시 찾아가니 그 좁은 곳에 손님들이 8명가량 서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깥 거리에도 손님이 열린 창을 사이에 두고 주인에게 주문하고 대화를 나누고, 손님들끼리도 서로 대화하며 즐긴다. 주인장이 우리를 기억하고 반가운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동네 주민도, 우연히 들어온 우리도, 그 공간에선 모두 같은 친구가 된 듯하다. 이 작은 공간이 술 한 잔과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 비좁은 이곳이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붐빌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비좁음이 오히려 ‘함께‘한다는 기분 좋은 반전으로 연결이 된다. LEMON을 거꾸로 해 NOMEL이라 이름을 지은 것처럼 말이다. 바에 들어오지 않아도 퇴근길 단골인듯한 사람들이 지나가며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이 공간 속의 그루브가 우리에게 멋진 마지막 밤을 만들어 주었다.
이 정겹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어, 그에게 좋아하는 장소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자, "Spot Coffee Stand “를 방문해 보라고 한다. 노멜에서의 인연이 다시 다른 곳으로 연결을 만드는 순간, 낯선 도시에서 낯선 이를 신뢰하는 일은, 여행자에게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다.
4일 차 – 더 멋진 일탈? 잔디밭 소풍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Spot Coffee Stand에서 시작됐다. 커피는 마치 녹은 다크 초콜릿처럼 진했고, 공간은 군더더기 없이 조용한 울림을 지녔다. 마쓰야마의 감각적인 사람들,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따뜻함, 그리고 그들이 알려준 이 도시만의 리듬. 이 도시가 가진 감각, 사람, 공간이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노멜의 사장님도 스폿의 사장님도 어찌나 세련되고 감각적인지… 어쩌면 두 사람다 광고나 디자인 업계 출신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에히메 미술관으로 향한다. 전날 비에 밀려 미뤘던 계획이었다.
전시 중이던 작가 요시다 가스이코의 그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House in Kako』 – 집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는데 그 단순한 선이 맘에 들었다. 무언가 조용한 정적, 한적한 동네… 마쓰야먀랑 연결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프라하에서 보았던 알폰스 무하의 전시도 열리고 있었지만, 본 적이 있기에 여기서는 패스하고, 일본의 기본 컬렉션에만 집중하며 두 바퀴를 돌았다. 다리가 아플 즈음, 미술관 로비에 작품처럼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나무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딱딱해 보여 망설였는데, 앉아보니 엉덩이를 감싸듯 푹신한 굴곡에 편안해진다. 이 의자조차도 마쓰야마를 닮았다. 겉으론 조용하고 무심해 보였지만 지난 3일간 내내 따뜻함과 정겨움을 준 마쓰야마처럼.
점심은 원래 오카이도에서 장어를 먹을 계획이었지만 피크닉으로 급변경한다. 미술관 잔디 공원 앞 5대의 푸드트럭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치킨과 만두를 포장해 넓디 넓은 잔디밭에 앉아 맥주 한 캔을 곁들이니 소풍 온 기분이다. 마침 유치원에서 소풍 나온 꼬맹이들을 보며 우리도 그 행복에 취해 본다. 언제 또 이렇게 화창한 푸름 속에 피크닉을 해보랴. “계획대로 가지 않아도 좋다.” 계획과 우연의 이중주. 나는 마쓰야마에서 우연이 가져다주는 더 큰 여행의 행복을 배우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계획대로 움직인 곳도 좋았지만, 덴지로 카페에서 만난 노인의 장인 정신이 담긴 듯한 커피, 노멜 바에서 주인장과 마주 들었던 '한 잔 하실래요?'라고 쓰인 광고문, 기차표를 날리고 사케에 취한 밤의 대화, 비 오는 날 반수이소에서 만난 고양이들, 그리고 잔디밭 소풍까지….그 모든 '의도하지 않은 순간들'이 이번 여행을 더 풍요롭고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여행이 주는 가장 진한 감정은 찾던 곳보다, 우연히 들어선 곳에서 온다. 지도에 없는 장소에서, 우리는 진짜 여행자가 된다.
마쓰야마는 서두르지 않는 도시다. 그곳에서 배운 느림과 여유가 일상으로 돌아온 내 안에 여전히 계속 살아 숨 쉬기를, 진심으로 그러하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