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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와 E 사이, 오늘도 오해받았다

by 이해피


여전히 낯선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첫 모임 자리에서 ‘MBTI’는 단골 화두다. 직업이나 나이를 묻기 조심스러운 요즘, MBTI는 식탁 위에 늘 올라오는 밑반찬 같은 존재다.



혼자 일하는 나는 전문가의 늪이나 내 생각에 갇히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낯선 상황과 사람들에게 나를 노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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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익숙하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공통의 관심사로 엮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사람은 다면체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어제도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20대 중반을 지나 서른을 넘긴 우리는 생각의 기준이 단단해지는 시기를 지나, 점점 ‘유연함’을 받아들이는 시점에 도달한 것 같다.



나는 MBTI를 처음 해본 10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단 한 번도 앞자리가 ‘I’에서 바뀐 적이 없다. 붙박이장처럼 익숙한 I형 인간이다. 늘 나를 설명하는 이니셜이었고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내향형 인간으로 나를 받아들여왔다.



그런데 의외로 어떤 모임에서는 나를 외향형 인간으로 본다. 사람을 좋아하고 대화 나누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호기심이 허락하는 자리에서는 이것저것 질문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나의 이런 면을 ‘E’로 해석하곤 한다.



얼마 전 영어 스터디 멤버들과 첫 뒤풀이 자리를 가졌다. 평소엔 영어로만 대화하다 보니 서로의 성향이나 취향을 잘 몰랐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MBTI 이야기가 나왔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I라고요?"

"검사 결과 잘못된 거 아니에요?"



요즘은 본인이 검사하는 것보다 주변 3명이 평가해 주는 게 더 정확하다는 말까지 곁들였다.



반면 접점이 거의 없는 새로운 커뮤니티에 가면 나는 ‘I’가 되어있다. 취미를 묻는 질문에는


“책 읽는 걸 좋아하고요. 걷는 것도 좋아해서 나무나 숲 있는 곳에서 산책하곤 해요. 가끔 홈트나 운동을 하고, 약속이 있으면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요.”라고 답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다른 반응이 돌아온다.



“그렇게 살면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니에요?"



술자리가 잦고 운동 모임과 약속으로 일주일이 빼곡한 그에겐 내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내가 지독히도 지루한 사람이겠지만 요즘 나는 어느 하나로 나를 규정하지 않으려 한다.



I스러운 나도 나고 E스러운 나도 나다.



어떤 날은 온전한 내향인으로 침대에 누워 유튜브만 보고 싶은 I가 되고, 어떤 무드에서는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E스러운 나도 있다. 그 모두가 지금의 나이고, 요즘은 그런 모습들이 마음에 든다.



좋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에 하는 말, “다 좋아.” 아마 이 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



물렁했던 시절, 단단해지려 애썼던 시간도 지나, 이제는 유연함과 흐름을 받아들이게 된 현재가 되었다. 앞으로의 나도 오늘처럼 나를 믿고 다정하게 나와 함께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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