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너는 빠르진 않지만, 느리지도 않아.
회사에서 선배와 함께 일할 때면 나는 나를 더 정확히 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건 선배와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과 있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렇게 나에 대해 더 알아가거나 무언가를 배우는 느낌이 들면 사람들과 있는 것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선배는 일 처리가 빠르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기도 하고 어떤 일이 떨어지면 빠른 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업무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 혼자 일할 때 내가 완벽주의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선배와 함께 있으니 내가 상대적으로 덜 완벽주의인 것 같다.
나는 혼자 일할 때에도 (내가 혼자 일했다는 건 나와 함께 있던 사수가 휴직에 들어가서, 나 혼자 업무 처리했던 것을 말한다.) 나는 내가 마감 기한을 지키기는 해도 성미가 느긋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급한데 급하지 않은 느낌? 신입일 때는 업무 기간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 소리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 그 후로 원래 정해진 마감일보다 2-3일 일찍 나만의 마감일을 정했고, 중간보고를 하는 식으로 업무 스타일을 개선하곤 했다.
아무튼 선배와 함께 있으니 나는 덜 완벽주의이고, 성격도 급하지 않고, 느긋해 보이는 것이다. 선배는 타자도 속도 800타로 치고 있는 느낌이면, 나는 한 500타로 치고 있는 느낌? 그리고 나는 보고서를 적을 때에도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일을 할 수 있는 스타일인데, 선배는 많이 해봐서 그런 건지 그림을 빨리 그리고 나와 일을 나누면서 앞을 향해 최고의 속도로 전진해나가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보고서를 나누어서 적다가 선배에게 컨펌을 받고 있었다. 선배가 마치 과외 선생님처럼 빨간 볼펜으로 피드백 코멘트를 적고 있었다. 나는 순간 학생 때 학습지 선생님께 1:1로 교육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자기 시간을 내서 섬세하게 피드백해줄 수 있을까. 회사에서 밑에 사람 가르쳐준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 선배의 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저 과외받고 있는 것 같아요.” 선배님이 코멘트를 빠르게 적어나가다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 “선배님, 저는 일을 빨리 하고 싶기는 한데 빠릿빠릿하지 않아요.(ㅜㅜ)”
선배: 아니야. OO 씨는 빠르진 않지만 느리지도 않아.”
나: “빨리 해야 되는데 속도가 안 붙어요.”
선배: “아니야. OO 씨는 빠르진 않지만 깊이가 있고 인사이트가 있어.”
너무 좋은 말을 해주는 거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뒤에 더 대화를 이어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준다는 건 감사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 내 밑에 사람이 들어오면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 줄 수 있을까? 내가 그때 깊이와 인사이트가 있어서 가르쳐줄 것이 많고, 시간을 내어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여유와 마인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좋은 사수, 선배, 상사, 팀장을 만난다는 건 어찌 보면 인생의 천운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만큼 만나기 쉽지 않다. 조직에서는 이슈와 정치에 의해 조직 개편이 많이 되고, 내가 원하지 않는 팀으로, 혹은 내가 원하는 팀으로 발령 나기도 한다. 영원하지 않을 시간들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대하고 잘해야겠다.
나중에 내 밑으로 후배가 들어오게 된다면, 내가 빠릿빠릿 하지 않아도 다른 장점을 봐준 선배처럼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이제 밑으로 누군가를 받을 나이와 직급이 되기도 했는데, 소중한 누군가가 들어오기 전에 잘 준비해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