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만에 제주도에서 다시 만난 우리
너를 만난 건 16살 때였고,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날은 친오빠가 다니던 학교의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마지막 행사였던 연주회에서 너는 플루트를 불고 있었다. 난 청소년기에 시력이 점점 나빠져 난시가 생겼고 눈을 찌푸려야 칠판에 있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멀리 있는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생김새가 귀엽기도 하고 앙증맞기도 해서 말을 걸고 싶었다. 우연처럼 인연처럼 끌렸다. 희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보면 귀엽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 그 오묘한 느낌이 인상 깊었다.
그 행사가 있고 1년이 지난 후 난 친오빠와 네가 다니던 그 학교로 편입을 했다. 그렇게 대전 시내에서도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시골에 위치한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며 친구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같은 방을 쓰지 못했다. 그게 같은 방을 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같은 학년, 같은 방, 같은 반이었기에 대화를 하면서 친해졌던 것 같다.
너는 사람들한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항상 인기가 많았다. 매력적이었고 성격이 좋았으며, 남을 이간질하거나 질투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래서 좋았다. 기숙사 생활 + 기독교 학교였기에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들이 간혹 있었는데 나는 그런 시선이나 생각들로부터 자유롭기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언니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종교 레벨에 대하여 판단하는 말을 했고 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너를 데리고 나와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했다.
아마 나만 말을 뱉는 일방적인 대화였겠지만, 너는 잘 들어줬고 나를 이리저리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목사님의 자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아서 고마웠다.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았고 그전에도 알았지만 꽤 괜찮은 아이구나 라고 더 느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우리의 친한 정도를 측량한다면, 대화를 많이 하거나 함께한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아 부족할 것이다. 강의실에서도 따로 앉거나 예배를 드릴 때, 밥 먹을 때도 같이 앉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너는 항상 사람들 사이에 둘려 싸여 있었고, 나는 그때 나만의 힘든 시간을 자처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있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들이 더러 있었다. 너는 좋았으나 사람들로부터는 상처 받았다고 여기는 때였어서 거리를 두고 지냈다. 악기 연습하러 간다고 둘러말하고 나 혼자 산을 1시간 동안 걷는다거나 하는 일상에서 스스로를 치유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졸업 후 성인이 되고 나서 우리가 같이 여행을 가거나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주변에서 의아해했다. SNS에 우리의 사진이 올라오면 네가 얘랑 친했냐며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또 제삼자의 눈으로 보자면 이해가 갔다. 주변으로부터 우리의 생김새나 행동이 비슷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우리가 붙어있는 시간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적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교 때 너랑 제주도 여행, 국내 내일로 여행을 갈 때는 몰랐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기숙사 학교에 같이 다닐 때 서로 붙어 다니지 않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너는 전라도 광주에, 나는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졸업할 즈음 너는 의전원 공부에 매진하느라 일 년에 몇 번 연락하기 바빴고, 나는 나대로 취업 준비를 하고 회사를 다니느라 애쓰느라 서로의 시간을 골똘히, 묵묵히 보내고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보거나, 아니면 일 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너는 대학교 때부터 사귀던 오빠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나에게 했고 24살의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그마저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제주도민이 되어 신혼살림을 제주도에 차린 너를 마주하면서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어찌 보면 기막힌 우연이자 인연이란 걸 체감했다.
이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는데, 내 단조로운 삶에 이토록 행복감을 주는 네가 고마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한테 뭘 해준 게 있었을까? 아마 사회에 나오고부터는 인간관계에서 기브 앤 테이크를 생각하게 되고, 이 사람이 나에게 이걸 주면,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떤 걸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던 나에게 너를 이 기간에 다시 만난 게 감사했다. 어린 나이에 너와 지내며 아무 생각 없이 주고 받았던 즐거웠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기억나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많은 국내 여행과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내게 일생에 기억에 남는 여행을 단 한 가지 꼽으라면 당연히 21살 때 너와 제주도에서 스쿠터를 타며 다녔던 여행이다. 학생이었기에 돈이 많지 않았던 우리는 무인 카페, 차가 아닌 스쿠터, 무료 숙소,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고 점심마저 건너뛸 때도 있었다. 어찌 보면 궁핍하고 가난했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지금도 그때 여행 사진을 보면 새록새록 설렘과 기쁨이 느껴진다.
이제 제주도민이 된 네가 너의 몸집보다 훨씬 큰 좋은 차를 운전하며 나를 아부 오름, 새별 오름, 제주도민 맛집에 데려다주는 걸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세월이 그만큼 흘렀구나 라고 느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운전면허가 없어서 네가 나의 이동 수단이 되어주었었는데, 21살에 풋풋한 얼굴로 스쿠터를 끌었던 너, 그 뒤에 타서 제주도 지도를 이리저리 살피던 나, 제주의 시원한 바닷 바람과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스쿠터를 타던 우리가 이제 30살이 되어 편안한 차에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조곤조곤 대화를 하며 제주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너의 신혼집도 참 편안했는데, 오빠와 네가 나를 많이 배려해주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리의 감정의 결이 여전히 비슷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너희 집으로 여행 일정을 마치고 들어가는데, 너는 너의 일상에 내가 스며들었다는 표현을 했다. 친구가 온 것 같은 느낌도 나지 않는다며 말이다. 딱 네가 그 말을 하기 직전에 내가 분명 여행을 왔는데 왜 몸만 서울에서 제주도로 온 느낌이지? 싶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같은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있나 보다.
그때 내가 느낀 건, 누구에게나 인생이 막 쉽지 않고, 가끔 아니면 종종, 아니면 간혹 한꺼번에 어려운 일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신은 그 사람에게 잘 견뎌내라고 그 사람 주변에 괜찮은, 좋은 사람들, 그 사람과 잘 맞는 사람들을 심어주신 게 아닐까 하는 거였다.
우리가 앞으로도 잘 지내면 좋겠다. 나는 제주의 바다와 나무, 자연도 좋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번 제주 여행 사진은 너랑 함께 찍은 사진이다.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기보다 너가 있는 곳이 제주도여서 간 여행이었다. 고마워. 건강하고 또 보자. 언제나 그랬듯 멀리 있더라도 마음은 가까운, 연락을 많이 하지 않아도 한결같은, 묵묵히 서로를 응원하는 인연이 되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