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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피 Aug 31. 2021

책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읽고

어떻게 사느냐는 곧 어떻게 죽느냐가 아닐까


의사의 일상과 그가 하는 생각의 움직임들을 글자로 읽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감동적인 책이었다. 어느 날 당근 마켓을 돌아다니다가 베스트셀러만 반값으로 판매하는 글을 봤고 이 책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좋다. 무겁지 않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문체들도 마음에 든다. 한국 사회에서 어찌 보면 죽음은 금기시되는 단어인 것 같다. 삶, 살아있는 것, 젊음, 청춘이라는 것들만 마치 축복이고 행복인 양 떠들어댄다. 작가는 이런 부분들도 책에서 꼬집고 있다. 나는 그런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아버지는 폐암에 걸리셨고 작가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가족들의 바람에 어느 날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서 굿을 하는 듯한 아주머니가 오셨는데, 그 생경한 광경에 당황한 작가는 아주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문틈 사이로 아버지를 몰래 바라봤다. 그 순간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아버지는 싱긋 웃으시며 브이자를 그리셨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 마지막인 줄 몰랐기에 집안에는 미처 뚜껑이 닫히지 못한 약통들과 옷가지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져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작가는 아버지를 슬픔에 겨워할 여력도 없이 떠나보냈다.


죽음이란 것은 애초에 우리에게 올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의 시간과 목표에 쫓겨 죽음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작가는 그런 쫓기는 일상 속에서, 혹은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아버지가 그려주셨던 ‘브이’가 굉장한 힘을 주었다고 했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브이일 줄 누가 알았겠으며, 약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작가에게 지금까지도 삶의 원동력이 될지 누가 알았을까.


덧없이 흘러가는 게 인생이라면 인생이겠지만, 어차피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언제 각자에게 올 일인지는 몰라도 현명하고 슬기롭게 ‘지금’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도 그 부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누가 죽음을 예상하거나 예견하고 살아갈까. 이 책은 작가가 종양내과 의사로 살아가면서 마주한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에 있는, 그리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간 환자들의 인생을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암에 걸린 어떤 할머니는 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결혼한 딸 옆집으로 이사해 아침에 아이들 유치원을 등교시키고,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가족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산책을 하는 그런 일상을 보냈다고 한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이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그 환자는 끝내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환자처럼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을 사회에서나, 각 개인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해내기엔 어렵겠지만...


어떤 사람은 의사에게 왜 나를 살리지 못하느냐고 역정을 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가, 너무나 아픈 나머지 제발 어떤 값이라도 지불할 테니 항암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뒤늦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가족이 없는 환자에게 겨우 연락이 닿은 남동생 1명을 불렀더니 마지막까지 그 동생에게 ‘너... 나한테 빌려간 2억... 갚아라.’라고 말한 환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끝내 별이 되었지만, 그 말은 그의 유언으로 남았다.


환자마다, 사람마다 각 기 어떤 인생의 모양과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죽음이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죽음이 양면이 아니라 이어지는 하나의 선이라면, 그 선 안에서 어떤 점들을 기록 해내갈지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다. 순간에 행복하고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것들, 주변 사람들에게 따듯함을 주고 내 주변을 심플한 상태로 정리하는 것들 그런 일상의 작은 움직임들이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가꾸어줄 것이다.



죽음뿐 아니라 작가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좋았다. 남의 인생을 쉽게 제단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무심코 뱉는 언어가 어떤 이에게는 비수로 꽂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서울대를 들어갔다고 했다. 장학금을 주고 국립대이기 때문에 학비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동아리에 가입하고 놀러 다닐 때 과외 3-4개씩 하며 고생하며 학비를 마련해놓으면 친척들이 가져가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어려서 대처하는 법을 몰랐고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그를 도와주는 지인들이 있었고, 교수님이 장학금을 연계해주셔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대학생 때 절에 다니며 마음을 다스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아는 체를 하며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어디 학교 다니냐 하면 서울대라 하고, 우와- 하는 반응이었다가, 아버지는 뭐하시냐 라 물으면 돌아가셨다 하면 안타깝다는 탄식의 표정이 보였다고 했다.


나의 슬픔의 크기를 누가 덜어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슬픔을 함부로 재단하는 이들의 따가운 시선에 다치곤 했던 작가.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본인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며 노력해야겠다고 쓰는 덤덤한 언어들이 마음을 울렸다.


작가는 분명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의 의사 선생님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 작가가 아버지를 잃고 혼자 감내했던 시간들과 의사로서 보내는 일상의 순간들이 그려지며 눈물이 나기도 했다. 직업인으로서, 의사로서의 고뇌  그리고 병원의 원가율이 70%로 정해져 있어서 한국의 환자들이 병원에 느끼는 어려운 부분들이 그려져 있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려있고, 어떻게 보느냐는 한 끗 차이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나 어렵다. 행복이 오든 불행이 오든 다 지나가게 되어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게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 언젠가 그 시간들은 은은한 향기처럼 퍼진다. 어느 날 돌아보면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암이라는 것도 죽음을 향해 가는 한 관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완치되는 환자도 있다.) 암이든, 사고든, 질병이든, 자연사이든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죽음이 온다는 사실이다. 마치 춤을 추듯이 일상을 살아가라는 말이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어찌 됐든 춤을 추고 있으면 어디든 당도하게 될 것이므로 말이다.


쉽지 않겠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숙제가 아닐까. 언젠가 나도 죽게 되겠지만 그 죽음을 잘 맞이하는 법은 스스로에게 다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남는 일일 것 같다.


암 환자를 매일 진료하는 종양내과 의사의 생각과 고찰들, 그리고 일상, 작가의 인생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을지 일러주는 책이었다. 언뜻 보면 무거운 소재이기는 하나 주변 지인들에게도 권장하고 싶다. 일단 엄마가 잘 읽고 있다. 당근 마켓 판매자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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