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해피 Jun 09. 2022

가까운 지인을 멀리 떠나보내고


그날은 엄마와 병원 정기검진을 다녀오던 길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질환 명칭을 제대로 안 날이었다. 병원을 이 년씩이나 다니며 매번 선생님과 상담도 했는데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면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주 토요일에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 오빠가 보낸 "안녕하세요"라고 시작하는 카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 참석 인원 파악하나? 아니면 다시 재공지 돌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안녕하세요 뒤의 말을 보자마자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오랜 암투병을 하고 있던 그 모임에 있던 다른 오빠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분명 내 눈으로 봤는데도 이 말이 맞나 확인하고 다시 확인했다. 스물네 명이 있는 그 카톡방에서는 하나둘씩 숫자가 없어지면서도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너무 놀래서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소중한 팀원을 잃었다는 자책감과 미안함, 후회스러움, 안타까움이 그 십몇분의 침묵 속에 가득했다.


나는 그 오빠를 작년 11월에도 봤다. 3월에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오빠의 청첩장 모임에 참여한다는 투표도 봤다. 분명히 3월 1일까지도 우리들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24명이 다 메시지를 확인했기에 메시지 창 옆에는 어느 숫자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오빠는 대장암 말기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 이년 동안은 모임에 나오지 못하다가 시간이 흘러서는 종종 모임에 나왔다. 암 투병을 하고 있다고 무겁지 않게 덤덤하게 말했었다.


작년 11월에 봤을 때 전이가 되어 그 해 많이 고생을 했고 몇 퍼센트의 확률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고생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갔을 때는 오랜만에 만나 두서없이 대화를 하던 10명 남짓한 우리들에게 오빠는 보드게임을 건넸다. 나는 어떻게 보드게임을 가져올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그땐 그걸 철없이 신기해했다. 우리들은 신나게 보드게임을 했고 마침 그 층에는 우리밖에 없어서 마치 대학교 때로 돌아간 듯 즐거운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런데 어느샌가 보니 오빠가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오빠는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는 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 순간이 마냥 즐거워서 기록한다기보다 이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작년 모임 이후 오빠가 올해 3월 청첩장 모임에 나온다고 투표했기에 당연히 회복 중이구나, 좀 괜찮아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연락을 받고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고 친한 언니와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부랴부랴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부의금 봉투를 건네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데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손끝을 부여잡고 가족들이 계시는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자 환하게 웃고 있는 오빠의 대학교 졸업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밝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보니 너무나 밝게 빛나던 오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가족들이 제일 슬픈 걸 알면서도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도착하기 전 미리 검색해 본 장례식장 예절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리저리 혼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에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족들을 뵈었다. 언니는 오빠의 어머니께 한 번 안아 드려도 되냐며 슬픔을 위로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할지 몰라 머뭇 거리는 나도 말없이 안아주셨다. 정말 좋은 오빠였다고라고 밖엔 달리 위로해드릴 말이 없었다. 오히려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오빠가 그전에 미리 준비한 거였을까 곰곰이 되짚어봤다. 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날 만났던 오빠, 오빠에게 연락했던 날, 오빠가 아프다고 말했던 날, 동아리를 같이하고 세션을 준비했던 날, 오빠를 처음 만난 날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남는 건 미안함과 후회, 안타까움과 죄책감과 같은 무거운 감정들이었다.


다음 날 부고가 새삼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날 같이 찍었던 동아리 사진들을 찾아보고 인스타그램도 찾아보고, 여전히 남아있는 카톡 프로필 사진도 살펴봤다. 이렇게 아직도 있는데 이제 없는 사람이라니 알면서도 모를 것 같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선한 사람이었는데… 병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다. 혹시 불편해할까 봐 아예 물어보지 않는 걸 선택했고, 가끔 가다 일을 핑계로 안부를 물을 때도 오빠는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줬었다. 어느 날은 문득 연락을 했는데 지금 병원에 급하게 와 있다고 다음에 연락하자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날이 전이가 퍼진 그날이었나 생각해본다.



곁에 있을 때도 너무 좋은 사람인 걸 알았지만 보내고 나서야 아픈 와중에도 사람들을 다정하게 대해주던 오빠가 얼마나 더 좋은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오빠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빠는 생사를 오고 갈 때 나는 오늘 뭐 먹지?라고 생각했을 거고 내가 사는 삶의 고민으로 채웠을 거라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엄마는 산 자의 삶은 계속되고 어차피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고 했다. 언젠가 죽음이 당도할 걸 알지만 그건 머리로만 알 뿐이다.



그간 더 잘 살아보겠다고 죽음에 관한 책들도 읽어보고 삶을 재조명했었는데, 이제 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로만 배운 삶의 조각들은 갈 곳을 잃은 퍼즐처럼 쓸모가 없었다.


오빠는 떠나기 전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가고 싶었을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해본다. 오빠를 만났던 마지막 날에 그냥 웃으며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일걸, 다른 사람들이랑 가지 말고 옆에 붙어있을 걸, 만나서 좋았다고 고마웠다고 말해볼걸, 왜 힘든 몸을 이끌고 나와준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괜찮아졌나 보다 하고 넘겼던 걸까. 젊고 건강한 모습만 기억했던 나머지 당연히 회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떠나간 것에는 이유가 없다는 말 말이다. 왜 나여야 하지도 없고 왜 내가 아니어야 하지 라는 이유도 없다는 문장이 나를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산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러나 현생에서 갚을 수 없는 부채감에 무겁다. 가만히 있다가 멍해지고 몸에 기운이 나간 것 같으며 다음 생이 있다면 만날 수라도 있는 건지, 그때 후회했다고 고마웠다고 아쉬웠다고 말할 수라도 있는 건지, 다음 생이 있는 건 맞는 건지, 지난 10년 남짓한 세월이 바람처럼 느껴진다. 차곡차곡 쌓인 건 시간이 아니라 흩어지는 순간들에 불과했는데 보다 소중히 대해주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빛나던 젊은 시절을 남기고 35세에 가버린 사람.. 남겨진 자의 몫은 무엇이며 이 부채감은 어찌해야 할지..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번뇌를 내려놓고 지금의 삶을 자족하며 살아야겠다는 약속 하지도 못할 다짐만 머리에 맴돈다.






이 글은 오빠를 떠나보내고 얼마 후에 기록했다. 지금도 아주 가끔 떠오른다. 날씨가 아주 맑고 좋을 때, 오빠가 다녔던 H대학교가 보이는 길을 지나갈 때 특히 떠오른다.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썼다.


고맙다는 말이 떠오를 때 고맙다고 하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이따금씩 지치거나 외로울 때, 길을 잃은 것 같은 때, 여유가 없어 주변 사람들을 돌보지 못할 때 꺼내어 읽고 싶다.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것도 없었고 제자리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찰나의 소중했던 순간들은 욕심내어 가져가고 싶다. 가져가고 싶은 기억들은 무언가 성취하고 가지고 이룬 것들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했던 아주 당연하고 사소하다고 여겼던 기억들이 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