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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밤 과자점 Jul 18. 2021

세 번은 너무 잦고, 두 번은 아쉬운

코로나 시대 런던에서 마신 술 이야기

심장이 터진다 해도 좋아한다, 너


 오늘도 나의 핏빗이 운동 열심히 하고 있다고 칭찬을 아낌없이 보내주고 있다. 심박이 120, 130 Active Zone을 채우고 있다고 알림이 오고, 폭죽까지 터트려 준다. 이렇게 가열하게 쉬지 않고 운동한 시간이 30분이 넘는다고 부르르 떨며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서 와인을 음미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핏빗은 모른다. 멍청한 녀석. 


 그렇다. 나는 알코올 분해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애주가다.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요동친다. 손발이 붓고 심하면 손바닥에 수포도 올라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술이 좋다. 내가 애주가라고 하면 코웃음 칠 몇몇이 떠오르지만, 단언컨대, 나는 술을 좋아한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에 좋은 술과 음식을 함께 하는 그 경험이 좋고, 술 마시고 심박이 빨라지면서 평소보다 긴장이 풀어지고 행동이 둔탁해지고 정신이 느슨해지는 그 느낌도 좋다. 몸은 힘든데 마음이 좋아. 그러니까 사랑 애, 술 주 자를 쓸 수 있는, 애주가다. 애주가라고 다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어떤 이성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었던 적이 없다. (이건 슬픈 일인가... 싶기도) 


 이런 나와 달리 혜림이는 알코올에 강하다. 그렇지만 혜림이는 탄산을 좋아하지 않아서 맥주(뿐만 아니라 모든 탄산음료)는 안 마시고, 와인을 주로 찾는다.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 혜림이에게 술은, 맛있는 음식과 함께 있어야 빛을 발하는 음료이다.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를 먹을 때는 와인, 삼겹살엔 소주 아니면 백세주처럼 음식과 술의 궁합이 맞아야 한다. 물론 혜림이도 가끔은 술이 먹고 싶어서 음식을 고를 때도 있지만. 알코올에 강한 혜림이는 처음 나의 심박수를 듣고 깜짝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좋아하는 나를 보고 신기해하였다. 몸이 힘든데도 지치지 않는 나의 술타령, 이제는 익숙해졌겠지만.

감바스와 터키 푸르민트, 파스타+리조또와 프랑스 쇼비뇽 블랑, 치킨과 스페인 프리미티보

일주일에 3번은 너무 잦고 2번은 아쉬운 


 어쨌건 나와 혜림이는 런던에서의 코로나 동거를 시작하면서 다양한 와인을 마셔보기로 했다.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외식도 못하는데 와인 여행이라도 해보자는 취지로. 그렇지만 둘 다 와인을 잘 아는 건 아니다. 탄닌의 텁텁하고 드라이한 맛을 즐긴다고 할 수는 없어서 레드와인보다 시원하고 산뜻하게 마무리되는 화이트 와인을 주로 마신다. 품종을 굳이 따지지도 않고, 대체로 점원이 추천해주는 와인 중에서 고른다. 사실 원하는 와인이 어떤 거냐고 물으면 딱히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점원이 추천해주면 끄덕끄덕하고는 그중에 라벨이 예쁜 걸로 골라온다. 덕분에 다양한 품종을 먹어보았다. 한국에서는 (몰라서) 잘 찾지 않았던 새로운 품종들을 많이 알게 된 건 나름 뿌듯한 일이다. 쉐닌 블랑, 프리미티보, 피노 그리, 템프라니요, 그르나쉬 블랑 등등등.


 처음 와인 여행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일주일에 3번 마시는 걸로 호기롭게 정했다. 그런데 일주일에 3일을 마시니까 좀 잦은 음주로 몸이 받쳐주지 않는 것 같단 생각도 들고 그에 맞는 식사를 매번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3번은 너무 잦으니 평일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정도로 줄이자고 다시 정했다. 그런데 또 2번은 뭔가 아쉬웠다. 일주일 중에 평일은 5일이나 되는데 그중에 하루만 마시려니 아쉬울 수밖에. 그리고 혜림이는 회의가 많은 날처럼 술이 당기는 날이 있고, 나는 대체로 매일 술이 생각난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맥주를 한 캔 사 와서 먹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와인 셀러에 와인 쟁여 놓듯 식료품 선반 안에 맥주도 항상 챙겨 놓게 되었다. 결국 나는 일주일에 3번쯤은 마신 꼴이다.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그렇게 우리가 아쉬움과 죄책감의 사이에서 고민하던 찰나에 나는 맹장염이 터졌고, 혜림이는 백신 1차 접종을 한 까닭에 우리의 음주 라이프는 잠시 휴식기를 맞았다. 나는 수술과 백신 1차 접종을 2주 간격으로 하는 바람에 술과 한 달을 헤어졌었다. 내가 함께 마시지 못하는 동안 새로운 와인은 따지 않고 먹던 와인을 마셨던 혜림이를 보며 부러워했던 나의 철없음이란. 그렇게 한 달만에 다시 만났던 날, 너무 행복했다. 어김없이 심박수가 급격하게 치솟았고 나의 기분도 함께 상승 곡선을 그렸다. 

  

부지런한 음주와 게으른 와인 리스트

 

삼겹살엔 역시 소주

술을 마시기로 한 날은 곧 우리가 마음 다잡고 요리하는 날이다. 함께 먹을 메뉴를 준비하느라 둘이서 엄청나게 바지런을 떤다. 어느 날은 닭다리 정육을 사다가 염지하고 튀김가루 입혀 정성껏 두 번 튀기고 양념까지 입힌다. 어느 날은 단호박을 사다가 삶아서 으깨고 생크림 듬뿍 넣어 단호박 크림 파스타를 만든다. 몸보신하자며 스테이크도 굽고, 꼬마 감자도 삶아 숟가락으로 눌러 스매쉬드 포테이토도 만들고. 새우와 마늘 듬뿍 넣은 감바스에는 찰떡궁합인 막스 앤 스펜서의 싸구려 바게트를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삼겹살이 먹고 싶어서 콩잎 장아찌 만들고, 파김치 담고, 쌈무도 준비하고 깻잎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면, 역시 삼겹살에는 소주니까 한국 식료품 가게까지 가서 참이슬도 준비하고, 그냥 소주는 심심하니까 요구르트도 사와 본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만들고 제대로 한 상 차린 후에 너저분한 부엌을 팽개치고 일단 먹고 마신다. 딱, 거기까지 부지런하다. 먹으면서 오늘 와인은 맛있네 어쩌네 말만 할 뿐.


 호기롭게 다양한 와인을 마셔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마셔본 와인에 대해 평점도 남겨보자던 우리는 정리하는 데에 영~ 소질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동거 기록 한편에 만들어진 와인 리스트 탭은 도통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다. 평점은커녕 마신 와인을 다 정리하지도 못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부지런한데 비해 게으른 우리의 와인 리스트. 지금까지 마신 총 16병의 와인들, 평점이 매겨진 것은 없다. 하. 하. 하. 그나마 혜림이가 사진을 남겼고 나는 겨우겨우 품종, 산지, 빈티지를 엑셀에 정리해 넣었다. 아래는 그중의 일부다. 이 중에는 기대보다 성공적인 것도 있고, 라벨의 귀여움에 비해 맛은 평균 이하였던 것도 있고, 산지의 명성만큼 훌륭했던 것도 있었다. 물론 여기 나온 것들 외에도 더 있지만, 더 마셔보고 기회를 봐서 다음에 더 올려보는 걸로.

 

Villa Maria (NZ, Riesling), Zephyr (NZ, Sauvinon blanc), Felicette (Fr, Grenache Blanc)
Hazaña (Spain, Tempranillo), Lumari(Italy, Syrah), The Sardine submarine (Portugal, Trincad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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