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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Jul 17. 2021

윔블던 유감

마흔에도 감정 콘트롤은 어렵다

Be careful what you wish for. You might just get it. 

불만에서 비롯된 소망을 말할 때, 영어권에서 흔히 듣는 얘기다. 무언가를 바랄 때 조심하라고. 진짜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이솝 우화에서 유래된 말로 알고 있다.


불과 2주 전, 나의 플랫메이트 유진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푸념 아닌 푸념을 적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해본 적이 없는 예민+불안 보스라 함께 살면서 부딪히고 스트레스 받고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웠다. 동시에 성격 좋은 유진이니까, 이번 기회에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법,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는 경험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걱정했던 일도 기대했던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나에게 모든 걸 맞춰주는 유진이 덕분에 갈등이 생길 수가 없고 그래서 문제도 없지만 그런 문제를 부딪히고 해결하는 경험도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유진이는 댓글을 달았지. 








그리고 바로 글감을 제공해줬다.


7월 8일 목요일

킹스크로스 근처 British Library에 자리를 예약한 날이라 노트북을 들고 나설 채비를 했다. 마침 유진이도 나갈 준비를 하고 나오길래 어디 가냐고 물었다.

어제 많은 일들이 있었지. 코로나 검사하러 학교 가.

응?

- 어제 윔블던 취소 티켓이 떠서 한 자리 예약했어. 금요일에 경기 보러 가는데 코로나 음성 확인서가 필요해.
- 누구 경긴데?
- 아직 몰라.
- 검사 결과가 바로 나와?
- 응 한 시간이면 나와.


윔블던 테니스 토너먼트는 1924년부터 도입한 Wimbledon Public Ballot 시스템으로 티켓을 판매한다. 경기 1년 전에 추첨을 통해 표를 배분하는데 날짜와 경기를 고를 수 없다. 하지만 코로나로 2020년 토너먼트가 취소됐고 올해도 경기 개최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기존 시스템과 다른 방식으로 판매했다. 


윔블던 경기를 보고 싶다고 얘기를 꺼낸 건 나였다. 티켓이 오픈됐을 때 이미 매진이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유진이는 환불 티켓을 노리고 계속 사이트에 들어가보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준결승 경기 이틀 전, 표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나도 모르게 계속 티켓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데 놀랐지만 일단 환불 티켓이 또 나올 수 있으니 집으로 돌아와 사이트를 계속 새로고침 했다. 표가 한두 장씩 뜨긴 했지만 결제 페이지까지 가기 전에 사라지기 일쑤였고 딱 한 번 좌석표까지 떴는데 너무 구석진 뒷자리라 포기했다. 


7월 9일 금요일

다음 날 유진이는 홀로 윔블던을 향했다. 나도 마침 휴가를 낸 터라 코벤트가든에 있는 Dishoom에서 아침을 함께 먹고 시내를 조금 돌아다니다 집에 왔다. 유진이는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준결승 경기 두 개를 연속으로 관람한다. 


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으며 점점 기분이 다운되는 걸 느꼈다. 조코비치가 출전한 두 번째 경기가 4시 30분이 넘어 시작됐고 너무 늦어지면 도중에 나오겠다던 유진이는 도저히 끊지 못하겠다며 먼저 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평소대로 저녁 8시쯤 방으로 들어갔지만 유진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기분이 점점 가라앉으며 눈물이 났다. 


유진이가 자기 표를 구해서 경기를 보러 간 걸 뭐라 할 순 없지만 내가 보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었고, 어쩌면 내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테니스 경기 관람은 생각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취소 티켓을 노리고 계속 들어가보고 있었다면 왜 나한테 미리 얘기하지 않았을까? 취소 티켓이 생기면 바로 잡아야 할 텐데 그럼 두 장이 떴다면 어떻게 하려고 한 걸까? 대놓고 화내긴 애매하지만 섭섭했다. 마침 다음 날이 토리미 기일이라 핑계 삼아 토리미 사진과 동영상을 찾아보며 울다 잠들었다.


7월 10일 토요일

Tate Modern 전시 예매를 한 유진이는 전날 밤 늦게 들어왔는데도 일찍 나갈 준비를 했다. 나도 기분 전환 삼아 쇼핑을 가려고 나오다 거실에서 마주쳤다.

유진아, 너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거 같은데, 나 생각보다 많이 서운한가봐. 내가 너한테 티켓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네가 잘못했다고 하기도 그런데, 내가 가고 싶어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유진이가 뭐라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유진이도 마음이 불편했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는 건 아니고, 너 불편하라고 하는 말도 아냐. 안 하면 마음에 담아둘 것 같아 말하는 거야.

그렇게 나는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쿨하게 툴툴 털어버렸다.



...고 착각했다.


7월 12일 월요일

하루종일 비 예보가 있는 날이었지만 기분도 꿀꿀해 카페에서 일할 생각으로 동네 카페 England's Lane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지만 처마가 있는 공간이라 오히려 빗소리가 좋았다. 자꾸 우울한 마음이 들어 글을 쓰면 나아질까 블로그에 글을 끄적였다. 


7월 13일 화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7시부터 줄줄이 회의가 있는 날이라 억지로 아침을 먹고 회의를 시작했다. 점심으로 삼겹살을 토핑한 짜파게티를 먹기로 했지만 입맛도 없고 혼자 있고 싶어 나중에 먹겠다고 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2시에 회의가 있어 냉동밥을 해동해 물 말아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시쯤 거실로 나갔다. 눈치 빠른 유진이가 자리를 피해줄 줄 알았는데 뭐 먹을거야? 반찬 꺼내줄까? 말을 걸었다. 배고픔보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커 그냥 방으로 들어왔다. 

- 밥 안 먹을거야? 나한테 화나는 거 있니?

유진이 입장에서는 당연히 신경쓰일 거다. 미안한 마음과 짜증이 동시에 일었다. 쿨하게 털어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쪼잔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괴로웠다. 그러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비난하는 모습을 다시 자책하는 무한 루프에 빠졌다.


(결혼해본 사람들이 어이없어 하겠지만) 아 이런 게 결혼생활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정도의 갈등은 금새 잊고 없었던 일처럼 지낼 수 있는 수준인데, 마음이 풀릴 새 없이 하루종일 함께 있으면 이런 거구나, 새삼 결혼한 부부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의도는 없었지만 유진이 덕분에 동거인과 갈등도 경험해 보고(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한 거지만), 글감도 생겼다. 유진아 일주일이나 우울한 에너지 팍팍 풍기는 동거인이랑 지내느라 고생했어. 미안하고 고마워. 더 성숙해질 수 있게 다음엔 좀더 센 걸로 부탁해! 라고 적고 싶지만 당분간은 입조심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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