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플랫메이트
유진이는 워낙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스타일이라 룸메이트(또는 플랫메이트)와 겪게 되는 흔한 갈등과 소소한 다툼도 지금까지 없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유진이 덕분이다. 오죽하면 '너의 무난하고 수더분한 성격 때문에 글감이 생기지 않는다'고 투덜댔을까. 나는 갈등 소재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데.
집을 구한 뒤 유진이는 나에게 원하는 방을 고르라고 했다. 각 방에 욕실이 달려 있고 크기도 많이 차이 나지 않았지만 조금 작은 방 욕실에는 욕조가 있다. 유진이는 나에게 큰 방을 양보하려 했지만, 나는 반신욕을 하고 싶은 마음에 작은 방을 택했다. 며칠 지내다 매트리스가 너무 푹신해 허리가 아프다고 하자 그냥 바꾸자며 매트리스를 낑낑 거리며 함께 옮겨줬다.
하루 식사 중 아침에 가장 진심인 내가 매일같이 빵 먹는 게 지겹다고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식탁에 떡이 놓여있고, 한인마트도 일본마트도 콘스프를 팔지 않아 좌절할 때 옥수수통조림으로 옥수수스프를 뚝딱 끓여내는 우렁각시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싫은 건 남들도 싫어할 거라 짐작한다.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시간 약속을 잘 지키고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 불필요한 소음을 내지 않게 조심한다. 그래서 성격 좋고 둔감한 사람은 눈치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좋은데 가끔 눈치 없게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경우. 이런 나의 이론에 반하는 검은 백조가 유진이다.
예민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나지만 얼마 전부터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자다 깨는 날들이 이어졌다. 늦게 자는 유진이가 방으로 들어가는 발소리나 문닫는 소리에 깨서 잠들지 못해 계속 피곤해 했다. 그 뒤 언젠가부터 내가 자러 들어갈 때 유진이도 방에 들어간다는 걸 알았다. 보통 내가 먼저 들어가고 유진이는 거실에서 한참 더 있다가 밤늦게 들어가는데, 아예 발소리와 문소리가 나지 않게 원천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 거다. 뒤늦게 알고는 놀랐다. 그렇게까지 배려하는 유진이한테, 그리고 그걸 한참 지나서야 깨달은 나 자신한테.
세상에 둘도 없을 플랫메이트지만 불평을 해야겠다. 유진이는 반성 유발자다. 유진이 앞에만 서면 엄살쟁이 생색쟁이 참을성 제로의 찡찡이가 된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걸어서 Waitrose에 장을 보러 간다. 바로 옆 골목에 한인마트와 일본마트도 있어 한 번에 필요한 걸 모두 살 수 있는 코스다. 걸어서 20분이 조금 넘는 거리라 산책 삼아 다녀오기도 나쁘지 않은데 돌아올 때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와야 한다. 무거운 걸 잘 못 드는 나는 (이건 아빠 유전자다) 장볼 때부터 "이건 무거워 다음에 사자"며 몸을 사리는데 유진이는 "안 무거워 내가 들게" 한다. 계산대에서 물건의 대부분이 유진이 가방으로 들어가는데도 돌아오는 길에 무거워하는 건 나다. 낑낑 거리며 집에 들어와 정리할 때 유진이 가방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식료품을 보며 부끄러워진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해본 적이 없는 예민+불안 보스라 함께 살면서 부딪히고 스트레스 받고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웠다. 동시에 성격 좋은 유진이니까, 이번 기회에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법,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는 경험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걱정했던 일도 기대했던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나에게 모든 걸 맞춰주는 유진이 덕분에 갈등이 생길 수가 없고 그래서 문제도 없지만 그런 문제를 부딪히고 해결하는 경험도 하지 못하고 있다.
구글에서 "여기가 첫 직장이에요" 하면 "이제 큰일 났다"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좋은 데서 시작하면 다른 회사 가기 힘들다고. 유진이는 동거계의 구글이다. 내년에 유진이 없는 런던에서 누군가와 또 함께 살 수 있을까? 이만한 동거인이 또 나타나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