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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탈튼튼 김프리 Nov 06. 2023

안방 퇴출을 피하는 최소한의 청소

아들, 진정 이게 최선인 거니?


일요일, 경고 1회의 시간이 다가왔다. 아들은 전에 운동하던 구단 친구들과 놀기 위해 아점을 먹고 12시경 나가 밤 7시에 들어왔다. 들어와 씻고 저녁을 먹으니 8시다. 열심히 뛰어 논 피곤이 몰려오는지 소파에서 뒹굴거리다가 갑자기 방청소가 생각이 났나 보다. 밤 9시가 다 된 시간, 갑자기 집안이 조용하길래 뭐 하나 슬쩍 봤더니 안방 퇴출을 피하기 위해 방 정리를 시작한다. 나가기 전 으름장을 놓았던 나의 말이 떠오르긴 한 모양이다.


1. 침대 위


일단 침대 위를 확인해 본다. 싱글 침대를 전부 뒤덮던 축구 유니폼과 옷들이 사라졌다. 옷걸이 걸고 옷장에 접어 정리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새로 지급받은 동복 훈련복은 여전히 그대로다. 아들을 호출해서 "동복도 비닐을 뜯어서 걸어놓는 건 어때?"라고 물어보니 대답이 없다. 그냥 애초부터 이 옷을 정리할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래도 헌 옷처럼 널브러져 있던 옷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침대의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아들의 수면 독립을 위해 큰 마음먹고 산 시몬* 침대와 알레르기용 침구까지 준비했건만 그냥 캠핑용 라꾸라꾸 침대나 들여놓을 걸 후회가 막심하다.

왼 : Before / 우 : After : 깨끗해진 침대 위


2. 방 바닥

다음은 붙박이장 앞 방바닥이다. 발냄새 진동하는 축구화와 풋살화를 왜 방에 놓는지 이해가 안 됐다. 다 필요 없고 이 냄새나는 신발들이 신발장에 들여놓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4켤레 중 2켤레는 방 바닥에 전시되어 있고, 신발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축구화 1개도 여전하다. 주황색 신발만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축구가방으로 들어간 거다. 축구가방 안에 들어가 있어도 꼬릿꼬릿한 냄새는 여전히 난다.


아, 이걸 정리라고 한 걸까........

엄마의 관점과 아들의 관점이 다르니 일단 넘어가 보자.


왼 : Before / 우 : After : 여긴 뭐가 달라졌지?
3. 책상 위

방에서 혼자 공부하라고 시키면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해찰하는 빈도가 늘어 타원형 책상을 거실에 놓고 학습지를 풀게 했다. 자연스럽게 방에 있는 책상은 온갖 잡동사니 차지가 되었다. 열심히 신었던 작아진 풋살화는 구매한 이후로 한 번을 빨지 않았다. 그 신발에 훈련 중 만났던 프로 선수들 사인을 받아 책상에 위해 올려놓았고 (방에 있는 신발이 5켤레네?) 대회 때 받은 수건, 집 앞 풋살장 갈 때 공과 신발을 넣고 다니는 나이키 가방, 먹으려고 빼놓은 포도당 캔디, 저금통, 훈련일지 전부 위치 변함없이 그대로다.


이 책상도 아들의 수면 독립을 위해 시어머니께서 주신 아들 용돈을 살뜰히 모아 큰 마음먹고 사줬는데 왜 사줬나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집중력 향상을 위해 철제 타공판도 사주고, 집에서 패스 연습하라고 개인 훈련용 그물망(?)도 사줬는데 차라리 이 돈으로 내 운동용품을 사는 게 낫지 않았나 싶다.


뭘 치운 거니?

신던 신발을 책상 위에 전시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적어도 사인을 받는 신발은 미리 빨아놓아야 하는 게 아니니?


왼 : Before / 우 : After : 똑같다

아, 칭찬할만한 게 있긴 하다. 작아진 이너웨어를 한데 모아 스스로 헌 옷 정리함에 넣은 거 그거 하나는 칭찬해주고 싶다. 옷을 옷걸이에 걸고 입지 못하는 옷을 버리는 걸 자주 해보면 정리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힐 테고 점점 더 발전할 거라 믿어는 본다.


이 방을 한 달 가까이 그냥 내버려 둔 나도 참 대단하다 싶다. 보통은 내 성질에 못 이겨 치워줘버리고 마는 게 정상이겠지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신경 끄고 살았더니 아들에게 청소와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칭찬해 본다. (칭찬이라 쓰고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뭘까)



아들 왈 : "엄마!! 나 다 치웠어!!!"

엄마 왈 : (치워진 방을 보고 뜨악한 후) "이게 최선인거지?"

아들 왈 : "응, 이건 최선을 다 한 거야. 나 너무 힘들어서 쉬어야겠어. 안아줘"

엄마 왈 : "아이고. 이거라도 애썼다. 이리 와"

힘껏 안아주면서 소파로 패대기를 쳤다.


결국 아들은 안방 퇴출 경고 1회에서 벗어났다.

이긴 것 같은데 진 것 같은 이 애매한 기분은 뭘까......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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