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경고 1회의 시간이 다가왔다. 아들은 전에 운동하던 구단 친구들과 놀기 위해 아점을 먹고 12시경 나가 밤 7시에 들어왔다. 들어와 씻고 저녁을 먹으니 8시다. 열심히 뛰어 논 피곤이 몰려오는지 소파에서 뒹굴거리다가 갑자기 방청소가 생각이 났나 보다. 밤 9시가 다 된 시간, 갑자기 집안이 조용하길래 뭐 하나 슬쩍 봤더니 안방 퇴출을 피하기 위해 방 정리를 시작한다. 나가기 전 으름장을 놓았던 나의 말이 떠오르긴 한 모양이다.
1. 침대 위
일단 침대 위를 확인해 본다. 싱글 침대를 전부 뒤덮던 축구 유니폼과 옷들이 사라졌다. 옷걸이 걸고 옷장에 접어 정리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새로 지급받은 동복 훈련복은 여전히 그대로다. 아들을 호출해서 "동복도 비닐을 뜯어서 걸어놓는 건 어때?"라고 물어보니 대답이 없다. 그냥 애초부터 이 옷을 정리할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래도 헌 옷처럼 널브러져 있던 옷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침대의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아들의 수면 독립을 위해 큰 마음먹고 산 시몬* 침대와 알레르기용 침구까지 준비했건만 그냥 캠핑용 라꾸라꾸 침대나 들여놓을 걸 후회가 막심하다.
왼 : Before / 우 : After : 깨끗해진 침대 위
2. 방 바닥
다음은 붙박이장 앞 방바닥이다. 발냄새 진동하는 축구화와 풋살화를 왜 방에 놓는지 이해가 안 됐다. 다 필요 없고 이 냄새나는 신발들이 신발장에 들여놓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4켤레 중 2켤레는 방 바닥에 전시되어 있고, 신발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축구화 1개도 여전하다. 주황색 신발만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축구가방으로 들어간 거다. 축구가방 안에 들어가 있어도 꼬릿꼬릿한 냄새는 여전히 난다.
아, 이걸 정리라고 한 걸까........
엄마의 관점과 아들의 관점이 다르니 일단 넘어가 보자.
왼 : Before / 우 : After : 여긴 뭐가 달라졌지?
3. 책상 위
방에서 혼자 공부하라고 시키면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해찰하는 빈도가 늘어 타원형 책상을 거실에 놓고 학습지를 풀게 했다. 자연스럽게 방에 있는 책상은 온갖 잡동사니 차지가 되었다. 열심히 신었던 작아진 풋살화는 구매한 이후로 한 번을 빨지 않았다. 그 신발에 훈련 중 만났던 프로 선수들 사인을 받아 책상에 위해 올려놓았고 (방에 있는 신발이 5켤레네?) 대회 때 받은 수건, 집 앞 풋살장 갈 때 공과 신발을 넣고 다니는 나이키 가방, 먹으려고 빼놓은 포도당 캔디, 저금통, 훈련일지 전부 위치 변함없이 그대로다.
이 책상도 아들의 수면 독립을 위해 시어머니께서 주신 아들 용돈을 살뜰히 모아 큰 마음먹고 사줬는데 왜 사줬나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집중력 향상을 위해 철제 타공판도 사주고, 집에서 패스 연습하라고 개인 훈련용 그물망(?)도 사줬는데 차라리 이 돈으로 내 운동용품을 사는 게 낫지 않았나 싶다.
뭘 치운 거니?
신던 신발을 책상 위에 전시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적어도 사인을 받는 신발은 미리 빨아놓아야 하는 게 아니니?
왼 : Before / 우 : After : 똑같다
아, 칭찬할만한 게 있긴 하다. 작아진 이너웨어를 한데 모아 스스로 헌 옷 정리함에 넣은 거 그거 하나는 칭찬해주고 싶다. 옷을 옷걸이에 걸고 입지 못하는 옷을 버리는 걸 자주 해보면 정리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힐 테고 점점 더 발전할 거라 믿어는 본다.
이 방을 한 달 가까이 그냥 내버려 둔 나도 참 대단하다 싶다. 보통은 내 성질에 못 이겨 치워줘버리고 마는 게 정상이겠지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신경 끄고 살았더니 아들에게 청소와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칭찬해 본다. (칭찬이라 쓰고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