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하고 맞짱 뜬다고?
예능은 딴짓이다 21
● 방송국하고 맞짱을 뜬다고?
무당같이 생긴 여자 국장
첫 번째 직장이었던 드라마 케이블 TV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 한분이 만나자고 부르셨다. 너무 오랜만의 통화라 반가워서 한걸음에 달려갔다. 선배 PD는 굉장히 유명하고 큰 제작사에 제작이사로 근무 중이셨다.
사무실은 여의도 중앙에 위치했고 정말 크고 피디들도 엄청 많았다. 웬만한 작은 케이블 방송국 사무실보다 규모가 컸다. 큰방들에는 큰 책상과 긴 회의 테이블 손님용 소파까지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촐랑촐랑 까불이 선배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엿한 제작사 이사님이 되어있었다.
회사 대표님이 나를 좀 보자고 하셨다고 대표실로 안내했다. 얼떨떨하게 따라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순식간에 원한 적도 없는 번개 면접을 당하게 되었다. 반갑게 맞이하며 “얘기 많이 들었다.”라고 했다. 난 그쪽 얘기 들어 본 적 없었다.
사실 나는 남한테 정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차가워서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마시멜로처럼 보드라운 사람이다. 하지만 너무 일에 파 묻혀 살다 보니 남한테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다. 오죽하면 담당 방송국 인사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알고 보니 MBC 출신 피디로 제작사를 이만큼 키운 알았어도 될 만한 분이셨다. 생각보다 젊으셨다.
1시간 동안 자신의 미래 포부가 무엇인지 들어야 했다. 누가 면접을 보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요는 이러했다. 자신은 내년에 독립제작사 협회 회장에 출마를 할 것이다. 그래서 방송국의 횡포에 맞서서 제작사의 권리를 찾아오겠으며 저작권을 공유하게 만들겠다. 당신이 이러저러한 능력이 있다고 들었다. 자신의 회사에 들어와 같이 일하면서 거사를 도모해 보자 했다.
방송사 들이랑 맞짱을 뜨자는 거잖아!!!
갑자기 피가 끓었다. 그동안 수없이 당하고도 아무 말 못 했던 서러웠던 일들이 드라마 하이라이트처럼 지나갔다. 지나치게 적은 제작비, 기획을 하고도 모든 공은 방송국이 백 퍼센트 가져가는 게 당연하며 과는 힘없는 제작사 너네들이 책임져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뜻의 계약서 문구들,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서로 물고 뜯는 아귀다툼을 해야 했던 제작사간의 과도한 경쟁시스템 등...
수 백 알의 계란 같은 제작사들이 뭉쳐 바위 같은 골리앗을 쳐부순다고 생각을 하니 놀면서 잠시 꼬불쳐뒀던 쌈닭의 전의가 공작새의 뒷꼬리처럼 촤라락 펼쳐졌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있는데 용감하면 무식하다는 말은 아직 없다. 난 용감해서 무식했다. 제작국장이면 대표 제외 넘버2 꽤 높은 자리인데 연봉협상 따위 하지도 않고 당장 출근하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대표님은 각 방송사에서 다 아는 유명한 글레디에이터였다. 나 같은 귀요미 쌈닭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미친 듯이 마저 놀고 첫 출근을 했다. 월요일 전 직원이 다 모이는 월간 조례회에서 내가 소개됐다. 50여 명쯤 되는 후배 피디들이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어디서 굴러들어 온 말 뼈다귀냐는 표정들이었다. 말했듯이 나는 남한테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앞으로 펼쳐질 전투에 잔뜩 흥분해 이글이글 불타고 있기에 바빴다. 나중에 후배 피디들하고 많이 친해진 다음 들은 나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우리 회사에 무당 같은 여자 제작국장이 들어왔다.”
이사로 재직하며 나를 영입한 선배 피디가 회사 출근 전날 나에게 귀띔을 해주셨다. “여기 피디들이 기가 굉장히 세고 텃세도 심할 것이다. 자기들이 국장 자리로 승진하려던 차장 피디들도 몇 명 있어 아마 달갑지 않게 여길 것이다.”라고. 하지만 텃세라면 내가 좀 안다.
출근 전날 특별한 의상을 준비했다. 노란색 긴 마 통바지, 입체적인 꽃이 많이 달려있는 초록색 긴 민소매 상의 그리고 분홍색 선글라스를 머리에 쓰고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높은 하얀 통굽 구두를 신고 갔다. 쇼미더머니에 출전해도 튈 의상이었다.
나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기를 꺾어 놓은 것을 넘어서 두려워하게 만들어 버렸다. 음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