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짱 Feb 05. 2016

[하루 한 편 구비구비 옛이야기]

귀신이 고쳐준 글  

성삼문이 중국에 사신으로 자주 다녔는데, 한번은 악양루를 지나게 되었다. 그곳엔 옛날 성현들의 유명한 글들이 붙어 있었다. 성삼문은 그것을 보고 자기도 악양루에 오른 흥을 표현하여 “천지동남객 등루흥불수(天地東南客 登樓興不收)”라고 써 넣었다. 그러고서 악양루를 내려가는데 공중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가만 들어 보니 흥(興)자를 눈물 루(淚)자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성삼문은 공중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글자를 고쳐 놓고 다시 길을 갔다. 천자는 그날 사신들을 전부 불러놓고 크게 시회(詩會)를 열었다. 시회의 주제어는 ‘사희(四喜)’였다. 사람의 일생에서 네 가지 기쁜 일을 쓰라는 것이었다. 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글을 짓기 시작했는데, 성삼문도 자리 잡고 앉았지만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에 있던 유리국(琉璃國) 사신이 글을 지어 놓고 읊는 소리가 들렸다.


동방화촉명(洞房華燭明), 동방에 화촉이 밝았다.

금방괘성명(金榜掛姓名), 장원급제하여 이름이 붙었다.

타향봉고인(他鄕逢故人),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났다.

대한감봉우(大旱甘逢雨), 큰가뭄에 단비가 내렸다.


성삼문은 유리국 사신의 글에 얼른 두 글자씩을 덧붙였다.


무월조방화촉명(無月洞房華燭明), 달이 없는 동방에 화촉이 밝았다.

소년금방괘성명(少年金榜掛姓名), 젊어서 장원급제하여 이름이 붙었다.

천리타향봉고인(千里他鄕逢故人), 천리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났다.

칠년대한감봉우(七年大旱甘逢雨), 칠년 가뭄에 단비가 내렸다.


성삼문이 이렇게 고쳐 쓴 글을 제출했더니, 천자가 큰소리로 읽었다. 유리국 사신이 듣고 보니 꼭 제 글인데 앞에 두 글자씩 붙어 있어 자기 것이라고 항의할 수도 없고, 성삼문이 먼저 제출했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유리국 사신은 잠시 후에 성삼문을 조용히 불러, 혹시 중국에 들어오다가 시를 지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성삼문이 악양루에 ‘천지동남객 등루누불수(天地東南客登樓淚不收)’라고 썼다고 하니 유리국 사신이 손뼉을 탁 치면서 “이 누(淚)자는 귀신이 아니면 넣지 못한다.”고 하였다. 글 실력으로는 이 유리국 사신이 성삼문의 몇 갑절은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저 정도면 명백히 표절이지요?^^ 귀신이 오죽 답답했으면 글자를 고치라고 훈수를 두었을까요. 한 글자만 바꾸면 천하 명문이 될 텐데, 淚를 느끼지 못하고 기껏 興이나 떠올렸으니 성삼문은 그저 B급 정도인 것이지요. 게다가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슬쩍 숟가락 얻어 자기 밥상인 듯 올리잖아요. 유리국 사신은 귀신의 글귀도 알아보는 재주를 지녔지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요. 그나저나 인생의 네 가지 기쁨 중 동방화촉이 첫 번째네요. 뭐, 그렇다고요.^^

작가의 이전글 [하루 한 편 구비구비 옛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