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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짱 Feb 09. 2016

[하루 한 편 구비구비 옛이야기]

도량 넓은 남편

예전에 윗마을에는 김판서가 살고 아랫마을에는 이판서가 살았다. 김판서의 아들과 이판서의 딸은 서로 한눈에 반해 마음 깊이 두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고백은 하지 못하고 늘 서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판서 딸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김판서 아들은 상사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마음 깊은 병이라 어떤 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김판서는 아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팔도강산 다니며 실컷 유람이나 하고 오라고 했다. 김판서 아들은 곧장 이판서의 딸이 시집간 집을 찾아갔다. 이판서 딸은 서울 어느 큰 대감집 셋째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김판서 아들은 그 앞집에 살던 팥죽 파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방물장수처럼 꾸민 뒤 그 집에 들어갔다. 그 집에서는 방물장수가 찾아오자 집안의 여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물건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자 안주인이 방물장수에게 셋째 며느리와 함께 자고 가라고 했다. 그 집 셋째 아들은 절에 공부하러 가서 셋째 며느리는 혼자 지내고 있었다. 김판서 아들은 이판서 딸과 같은 방에서 자게 되자 이판서 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서로 그리워하던 두 사람은 하룻밤 회포를 진하게 풀었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닷새쯤 지나자 김판서 아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매일같이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큰아들이 가만 보니 수시로 집에 들락거리는 방물장수가 아무래도 남자인 것 같았다. 큰아들은 절에 사람을 보내 동생을 불러왔다. 셋째 아들은 형님 말을 듣고는 걱정할 것 없다며 그게 사실이라면 그놈을 죽여서 토굴에 묻어버리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먼저 방에 들어가 확인해 보겠다며, 형은 칼을 들고 문 밖에서 지키고 서 있으라고 했다. 셋째 아들은 이판서 딸과 김판서 아들이 함께 자고 있는 방에 들이닥쳐 큰 소리로 옷을 벗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다시 큰 소리로 “아휴, 실례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꼭 남잔 줄 알았는데 여자가 분명하니 제가 잘못 봤습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형님에게는 생사람 잡을 뻔했다고 하고는 자신은 다시 절에 가겠다고 하였다. 김판서 아들과 이판서 딸은 그 후로 크게 뉘우쳐 공부에 전념하고, 남편을 더욱 정성으로 모셨다. 얼마 후, 김판서 아들과 이판서 딸의 남편은 모두 급제하여 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은 안 하지만 늘 도와주고 챙겨주면서 각각 영의정과 우의정이 되어 잘 살았다. [한국구비문학대계] 4-3, 57-65면, 온양읍 설화19, 신랑의 아량


비슷한 문제상황을 가진 이야기로 ‘처용가’도 떠오르는데요, 처용은 안방에 들어가니 다리가 넷이고,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본래 내 것이었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할꼬, 하고 물러납니다. 도량 넓은 남편이나 처용이나 둘 다 ‘쿨함’의 진수를 보여주지요. 찌질하게 매달리지 않고, 울며불며 원망하지도 않고, 이미 벌어진 사실 자체를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누구 탓을 하지도 않고, 결국 상대방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물러서게 하지요. 김판서 아들은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여 높은 벼슬에 오릅니다. 처용이 도리어 춤을 추며 물러나자 역신은 앞으로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만 보아도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 귀신 형상의 그림을 붙이게 된 사유가 되지요.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 어느새 남의 것이 되어 있을 때, 혹은 내 소망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확고한 가치관과 태도에 의거하여 새로운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상황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이는 곧 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관계에 침입해 왔던 낯선 이마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존재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 매우 수준 높은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악학궤범>에 수록된 처용 탈이에요. 네이버에서 퍼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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