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구비문학대계] 5-2, 고산면 설화2, 구씨성(具氏姓)의 유래
요새는 효, 효행 이런 얘기 하면 꽤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뭔가 강요당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렇습니다. 우리 옛이야기에도 효자, 효녀, 효부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요, 이런 이야기 들려드리면 거의 대부분 성인들은 그게 다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기도 하지요. 일단 아래 이야기 한번 보셔요. 이야기 세계에서 효자들이 호랑이랑 좀 친하거든요?^^ 호랑이도 알아보는 효자 이야기입니다.
옛날 고산면에 구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아버지 상을 당해서 심억재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호랑이가 구씨가 시묘살이하는 움막에 찾아와서 같이 잠을 잤다. 처음에는 무섭고 그랬지만 날이 가니까 친근해졌고 호랑이가 안 오는 날이면 서운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호랑이가 오지 않기에 어찌 됐나 하고 기다리다가 설풋 잠이 들었는데,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서는 “내가 지금 함정에 빠져서 거의 죽게 됐으니, 급히 와서 나 좀 구해다오.” 하는 것이었다. 이게 어쩐 일이냐 하고 꿈에 본 곳으로 황급히 쫓아가 보니, 구씨와 함께 잠을 자던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있었고 그 동네 사람들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함정 근처에 삥 둘러 서 있었다. 구씨가 황급히 “그게 내 호랑이니까 건드리지 마라.” 하고 고함을 치면서 쫓아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호랑이도 제 호랑이가 있는가?" 하면서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호랑이 같으면 들어가서 보듬고 나와보라고 하기에 구씨가 서슴없이 들어가서 보듬고 나왔다. 그랬더니 호랑이가 구씨를 태우고 묘소까지 가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나중에야 구씨가 효자이고 호랑이는 그 구효자를 모시는 산신(山神)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에서도 이 사연을 알게 되어, 예전에는 구씨가 '원수 구(仇)' 자를 썼다는데, 어찌 사람의 성으로 원수 구자를 쓸 수 있느냐 해서 '갖출 구(具)' 자로 바꿔줬다고 한다. 지금도 시묘골(侍墓谷)이라는 곳이 고산에 있다.
짧지만 꽤 많은 편수가 전승되는 유형의 이야기입니다. 위 이야기는 전라남도 완주 지역에서 전승되는 것인데, 시묘골이라는 지명은 그 동네에 지금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산속에서 만나는 호랑이는 사람도 잡아먹는 강하고 무서운 존재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산신의 현신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절에 있는 산신각에 수염 허연 할아버지 옆에 늘 호랑이가 함께하고 있음을 떠올려 보세요. 시묘살이라는 것은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묘 옆에 움막을 지어 삼베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탈상하기까지 꼬박 3년을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다 하는 것이기도 했겠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지요.
이런 풍습은 유교의 예법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지극정성으로 해내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산신도 감응하는 법입니다. 그런 의례를 정성스럽게 해내는 데에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의무감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0.1도 없는데 시묘살이를 지극정성으로 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최근엔 '효'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일은 성인 자녀들에게 매우 큰 물리적, 정신적 부담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어 그 부담을 짊어지고 생활하는 이들이 주변에도 많은데요, 그런 분들에게 효자네, 효녀네, 이런 이름으로 칭찬이라고 건네는 말들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치매 아버지를 모시는 제게도 친구들이 효녀라고 하는데, 나를 그런 틀 안에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옛날 이야기들에서 흔히 보이는 효자, 효녀들이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유교적 예법을 지켜야 한다는 체제수호적 가치관에 기반하여 마음에도 없이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막상 어떤 상황이 되고 보면,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연민이라도 생기게 마련이고, 병든 부모 수발도 그런 인간적인 감정에 의거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거기에 제 경우엔 죄책감도 크게 작용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효'인 것 아니냐, 따진다면 별다르게 할 말도 없지만 아무튼 꽤 복잡한 감정이 작동하는 일이긴 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효행 관련 이야기들이 소개될 텐데, 이야기 속 인물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들을 하게 되었을지, 여러분 각자에겐 어떤 부분이 자극되는지 차분히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따라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 '시묘골'이라는 지명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의 시묘골에는 비석?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