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짱 Apr 11. 2024

처녀 귀신 도와주고 명의 된 사람

[하루 한 편 구비구비 옛이야기] 서면 설화 75

평안도 성천에 이경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가난했다. 흉년이 들어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고개 넘어 사는 부자 친구에게 돈을 좀 빌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는 사람 백 명이 모여야 넘어갈 수 있다고 하여 백넘이 고개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고개 아래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말렸지만 이 사람은 혼자 고개를 넘어갔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한 여자가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서 손으로 땅을 집고 발은 하늘로 뻗친 치마가 내려와서 아래 싸인 상태로 거꾸로 있었다. 누구든지 가다가 모습을 보면 기함을 해서 죽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여자가 다가오자, “그래 너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하고 물었다. 

“과연 귀신입니다.”

“귀신이면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이런 행동을 하느냐?”

“아,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사람을 구하려고 이럽니다.”

“사람을 구하다니, 뭘로 사람을 구하느냐.”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취를 들였는데, 그 계모가 어떤 약을 먹여서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너머에 묻으면서 내 가슴에 칼을 꽂았고, 부서진 무쇠를 네 구석에 묻어서 도저히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사람이든지 귀인을 만나면 ‘이 칼을 좀 빼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죽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내가 사람을 해코지하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그 이야길 듣고 그럼 함께 넘어가자고 하니 귀신은 벌떡 똑바로 일어나 앞서갔다. 귀신을 따라가 보니 조그만 묘가 하나 길가에 있는데 귀신이 이것이 자기 묘라고 하였다.

“내가 오늘은 친구에게 돈 빌리러 가는 길이라 아무것도 없으니 내일 오는 길에 괭이를 하나 얻어 가지고 와서 네 몸의 칼을 빼내 주마."

그러니까 귀신이 묘에 쑥 들어갔다. 이 사람은 친구 집에 가서 사정 얘기를 하며 돈을 한 백 냥 빌려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친구는 자기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하면서 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친구네 말고는 어디 또 빌릴 곳도 없고 하여 그냥 어느 집에 들어가 괭이 하나 겨우 빌려왔다. 그리고 귀신이 들어갔던 묘를 파헤쳐 보니 과연 시신 가슴팍에 칼이 꼽혀 있기에 칼을 빼내고 무쇠 쪼가리도 다 집어내 버린 뒤 봉분을 큼직하게 하여 묘를 다시 만들어 주었다. 그랬더니 귀신이,   

“내가 시집도 못 가보고, 또 죽은 고혼이라도 그 칼을 몸에 품은 채 아파 못 배기던 걸 당신이 와서 해결해 주었으니 그 은공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따라다니며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경화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는 귀신을 데리고 갔다. 귀신은 이 사람 눈에만 보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아 함께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 한 동네에 갔더니 마당에 사람이 모여 있는데, 목수들이 모여 앉아서 널을 짜고 있었다. 귀신이 저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체를 한번 보자고 하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그집 마당에 들어가 연유를 물으니 무남독녀가 어제 죽어서 관을 짜는 중이고 내일 장사를 지낼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 그럼 죽은 시체를 내가 좀 보면 어떻겠느냐?”

마당에 모여 있던 손님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이 미친 놈의 자식아, 남 죽은 시체는 뭐 하러 보려고 하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마당이 소란스러우니 그 집안 주인 영감이 나와 무슨 일이냐고 하였다. 

“아, 어느 지나가던 미친 놈이 죽은 시체를 자꾸 보자고 합니다.”

영감이 생각해 보니 희한한 일이었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영감은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시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귀신을 무릎에 앉혀 놓고 있으니 귀신이 침 놓을 자리를 알려 주었다. 주인 영감은 어제 죽은 사람에게 침을 놓자고 하니 미친 사람 같았지만 일단 해보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귀신이 가르쳐주는 대로 침을 몇 대 더 놓았는데, 그러고 나서 한 시간쯤 있다 보니 죽은 사람이 숨이 탁 틔며 살아나는 것이었다. 그집에서는 기가 막히고 반가워서 이 사람에게 몇백 냥 되는 돈을 주었다. 이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와서 집에는 식량과 농사 지을 밑천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귀신과 함께 조선 팔도로 돌아다니면서 병든 사람에게 침을 놓았는데,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이 사람에게 침을 맞고 나선 다 싹 낫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일자무식이었지만 조선땅 평안북도 성천에 이경화가 아주 편작이라고 소문이 났다.




대계 채록 제목은 <귀신의 도움으로 점치는 이경화>인데, 점 치는 것도 아니고 침 놓는 일이라 좀 맞지 않고 재미도 없는 제목이어서 조금 손 봤어요. 고친 제목도 좀 심심한가요?^^ '처녀 귀신 원한 갚아준 덕에 명의 된된 사람' 정도 해야 하려나요. 

그런데! 혹시나 하고 찾아 보니 명의로 이름 난 이경화라는 분이 실제로 있네요. <<광제비급(廣濟秘笈)>>이라는 의술서를 편찬하였고, 지금도 이 책에 기재되어 있는 생약은 질병치료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보통 민담에서는 주인공에게 이름이 없지요. 기껏해야 나무꾼, 숯구이, 총각, 영감 이런 식인데 여기엔 굳이 이름이 있기에 찾아봤지요. 구연자가 주인공 이름을 기억해 내느라고 한참 애쓰기도 했거든요. <<광제비급(廣濟秘笈)>>이라는 책은 <<동의보감>> 급의 자료인 듯합니다. 4권 4책 목판본으로, 정조 때 함경도관찰사인 이병모(李秉模)가 이 지방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구료(救療)에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경화에게 이 책을 편술하게 하였고, 현재 규장각 도서에 있다고 하네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212)

뭔가 뛰어난 기술이나 능력을 가진 인물에게는 이렇게 '귀신 들린' 이야기가 뒷배경에 깔리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일에는 이렇게 귀신 아니면 도깨비 조화가 들러붙게 마련이지요.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된 연유로 귀신의 조화를 떠올리고, 귀신이 도와주게 된 연유를 설명하기 위해 '보은(報恩)'의 구조를 가지고 오는 것이지요. 거기에 계모의 악행이 동원되는 것이고요. 이야기들이 이렇게 논리를 갖춰가는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참 재미있어요. 마치 레고 블럭 조립하는 것 같지요. '계모의 악행'이란 것도 그 당시 풍습이 어쩌고 계모들은 다 나쁘고 저쩌고 하며 진지하게 분석할 일이 아니랍니다. 재미나게 갖다 쓸 수 있는, 흔한 노란색 블럭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되지요. '귀신의 조화'는 평범한 인간계의 논리로는 잘 설명되지 못할 정도의 일에 갖다 쓰는 빨간색 블럭 같은 것이고요.

그 귀신의 조화가 내게는 찾아오지 않으려나 싶네요. 아, 그러려면 귀신을 먼저 도와줘야 하네요. 그런데 저 귀신이 처음 나타날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려보세요. 그 모습도 보아 넘길 수 있는 담대함이 그대에겐 있으신가요?^^ 

작가의 이전글 호랑이와 함께 시묘살이 한 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