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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Nov 07. 2019

82년생 김지영이 꼴도 보기 싫은 이유

영화 개봉 전. 내 손에 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책 표지를 보고 남자 친구가 말했다.


82년생 김지영 꼴도 보기 싫어.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책 표지도 안 열고 악플 세례를 하거나, 영화 개봉도 안 했는데 평점 테러를 하는 그들 중 하나가 내 남자 친구라니.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놀란 마음을 진정했다. 평소 페미니즘 운동을 주제로 이성적인 대화를 했던 남자 친구 아니었나. 이유를 묻자 돌아온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명료했다.


후배들의 성과를 가로채고 이간질까지 시키던 팀장의 이름이 하필 김지영이었다는 거다. 전 회사 여자 팀장의 무능함과 업무 미루기는 그가 이직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김지영 씨는 후배들에게는 악덕 상사였으나 임원들에겐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단다. 자세한 나이는 모르지만 당시 30대 중반으로 나이도 82년생 정도였을 거라고 했다. 그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만 봐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다고 했다.


남자 친구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직장에서 만났던 80년대 초반생 여자 상사들은 어떤 모습이었지?' 곱씹어봤다. 성별과 무관하게 회사 선배 중 배울 점이 있고,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며 아랫사람들까지 챙기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또래 직장인들과의 이야기를 종합해봐도 업무능력과 인성 모두 갖춘 상사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우리는 협업이 불가능하며 개인사에 남을 만큼 치밀하게 괴롭히던 상사를 여럿 겪었다. 후배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선배도 드물었다.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후배를 깎아내리거나 불편할 만큼 상사의 험담을 하며 신입사원을 당신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는 상사도 여럿이었다.



괜찮은 상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왜 여성 상사의 무능은 더 깊이 각인되는 걸까.

쉽게 마주치기 힘든 여성 상사라 그녀들의 무능이나 특이한 성격이 더 회자되는 건 아닐지. 임신과 출산, 육아에 유리천장까지 부수며 15년 이상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은 소수다. 올해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매출액 500대 기업 여성 임원 비율'을 보면 2013년 2.3%에서 소폭 상승해 지난해 3.6%를 기록했다. 임원뿐만 아니라 부서장급의 여성을 찾기도 힘들다. 그러니까 회사에 남자 팀장은 10명인데 여자 팀장이 1명일 때. 그 한 명의 팀장이 수많은 이에게 여자 상사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는 거다. 90년대생이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보다 사회적 배려와 모성보호제도가 없던 때 82년생 김지영들은 악착같이 일하며 조직에서 생존했다. 그녀들 역시 처음부터 직장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악덕 상사가 그렇듯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잘못된 방법들이 습관이 된 것이리라.


내 좁은 생활 반경 속 사람들의 의견이라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모든 82년생 여성들이 영화 속의 김지영처럼 선량하며 악의 없고, 업무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닌 건 확실하다. 사회생활을 하며 '괜찮은' 김지영 씨가 되는 길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직장에서 나는 얼마나 괜찮은 후배이자 선배였을까.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민 대표(권해효 분)가 던진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는 명대사에 찔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금전적 유복함이 만든 시간과 감정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개새끼가 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출산, 육아, 가족의 신상 변화 등이 업무와 함께 몰려들 때. 보통 사람들은 일터에서 비생산적인 사람이 된다.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늘 부족해 탈진상태에서 아등바등 최선을 다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다.


영화 속 선량한 김지영 씨와는 다르게 현실의 악덕한 김지영들은 우리 사회가 기른 괴물이다. 우리 사회는 모두에게 금메달리스트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나. 직장에서 인정받으면서 훌륭한 엄마와 아내의 역할까지 다 해내는 여성만을 칭송했다. 사실 아이를 봐줄 건강한 양가 부모님이 없거나, 입주 가사도우미를 둘 만큼 집안 자산이 넉넉하지 않다면 성공한 슈퍼우먼은 존재할 수 없다. 아빠의 육아휴직은 우리나라엔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돕는 제도가 있는 해외에서도 직장 내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는데.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어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여성들은 쓸모없고 부족한 사람으로 치부했다. 모두에게 '슈퍼우먼'이 되라고 강요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낙오자가 되는 거다. 묵묵히 모든 부조리함을 감내한 어머니 세대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왔다. 우리 사회와 제도는 직장에서 여성이 생존하지 못하는 환경을 방치했으며, 모성을 강요했다.



현실에서 마주친 김지영 씨들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만들어낸 여성 혐오감

어쩌면, 영화와 책을 보지도 않고 비난을 쏟아내는 이들도 개인적으로 마주친 괴물로 변한 김지영들로부터 트라우마 비슷한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닐까. 직장 밖의 김지영들도, 비혼 여성 김지영들도 배려와 도움 없이 방치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남과 여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생긴 가시들로 서로를 찔러댔을 거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여성들이 사회초년생이던 15여 년 전.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남아선호 사상에 젖은 어른들이 많았을 거고 일상적인 성희롱과 유리천장으로부터 그녀들의 성격과 삶에 굴곡이 생겼을 거다. 82년생 김지영들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직장 내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들 에너지를 사회에 뺏겨버렸다. 그녀들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전통이 기른 남성들과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대화할 기운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80년대생 남성들도 빠르게 변하는 사회가 힘겨울 거다. 60~70년대생 남성들이 고추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누렸던 사회의 우대를 못 받은 채, '남자는 강해야 한다' 따위의 말을 세뇌당한 그들. 어머니가 차려주는 삼시 세 끼를 먹으며 청소와 빨래에는 손을 대본 적도 없는 그들이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랬는데 왜 너희는 그렇게 별 거 아닌 일에 엄살이냐"는 말이 늘 목 끝까지 차있을 거다. 특히나 왜 남성만 군 복무를 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향할 곳 없어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날카로운 말들로 찌르고 있다. 타인에게 불쾌한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삶의 무게에 짓눌린 한국사회의 일부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귀를 닫고 악다구니를 부리고 있다.


현실 속에서 마주친 불쾌감을 굳이 영화에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다. 영화와 책 모두 일상에서 겪은 젠더 연관 사건을 나열해 치졸한 공감을 요청하지 않으니 말이다. 내가 경험한 김지영 씨가 아무리 끔찍해도 왜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 전반에 나타났는지는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82년생 김지영> 원작 소설 저자 조남주는 10년 동안 <PD수첩>등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였다. 조남주는 시사 프로그램 대본을 쓰며 열람한 수많은 자료들에서 얻은 통찰을 소설에 버무려 통계를 기반으로 이야기했다. 숫자가 증명하는 우리 사회의 아픈 단면을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인물에 녹여낸 거다. 허구의 인물 한 사람, 82년생 김지영은 우리 사회에 수많은 생산적인 논의와 소모적인 언쟁을 함께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조남주의 소설은 '한 편의 사회학 보고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맡은 80년 대생들의 진짜 현실을 빚어낸 문학이자 보고서가 정치적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꼴 보기 싫은 김지영 씨 마저 연민하게 만든 책과 영화의 힘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각본을 맡은 유영아 작가는 “문제의식은 가져가되, 함께 영화를 보는 부모님과 남편, 혹은 남자 친구의 공감과 이해도 끌어내야 한다고 봤다. 그들에게 죄책감을 유발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여성, 청춘,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응원하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라고 <씨네 21>과 인터뷰에서 말했다. 책이 80년대생 김지영 씨가 혼자의 힘으로 겪어낼 수 없는 사회 현상에 집중했다면 영화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우리 사회 인식과 제도의 무게를 다뤘다. 영화는 김지영 씨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함께 짊어질 부모세대와 동시대의 남성 그리고 희망을 가진 다음 세대가 있다고 말해준다.


분노를 쏟아낼 곳은 영화 평점이 아닌 우리의 제도와 인식 그리고 정치다. 사람들과 만나고 직접 대화하며 꾸준히 부딪혀보자. 모두의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하니까. 10여 년 남짓 차이라도 한국 사회는 특히 변화가 빨라 각자가 겪어온 역사도, 나고 자란 가정환경도 다르지 않은가. 사회의 부조리함에 곪은 마음을 온라인에서만 분풀이하면 긍정적인 변화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사회의 제도와 인식 때문에 피해 입은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기 시작할 때다. 한국에 태어난 사람들이 슈퍼우먼,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어도 편안하게 평생의 단계들을 밟아가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지 찾고 힘을 합쳐야 한다. 영화와 책이 말하듯 지금의 성별 전쟁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모두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언쟁보다는 누구도 다치지 않는 합리적인 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


영화를 보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남자 친구를 여러 번 설득해 극장으로 갔다. 그는 영화에서 자신과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옆에 앉은 나를 봤다고 했다. 우리는 다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고 같은 장면에서 웃으며 손을 꼭 잡고 극장을 나섰다.


그가 현실에서 마주친 무서운 김지영 씨도 더 이상 트라우마로만 남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한 주 남짓 지났을 때, 그는 악덕 상사 김지영 씨가 아이 사진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상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직장에서 아무도 그녀가 육아에 고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할 만큼 두꺼운 벽을 치게 된 과정이 있겠지.” 하는 대화도 나눌 수 있게 됐다. 물론 여러 사람을 이직하게 만든 상사를 용서할 만큼 성스러운 배포는 없지만. 그래도 ‘여성 김지영 씨가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시작하게 된 건 순전히 영화 덕분이다. 우리는 흑화의 과정 중에 있는 여성 직장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했다.


<82년생 김지영>은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손댈 엄두를 못 냈던 우리 사회의 아픔과 치부를 명료하게 드러냈다. 통계청에서 내놓은 자료상 80년생 여성 중 가장 흔한 이름이라는 김지영. 그녀를 닮은 80년생 김성호, 90년생 이민지-이정훈, 2000년생 박서연-박민준 씨의 진짜 현실과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 나오겠지. 각 세대의 아픔과 사실을 담은 뛰어난 작품들이 만들 뜨거운 소통과 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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