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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Nov 17. 2019

저 새끼 미필인데요?

신입사원 연수에서 각종 게임과 장기자랑에 목숨을 건 결과 우리 조가 1등을 했다. 으쌰 으쌰 거리며 동기애에 젖어있던 우리 조 테이블. 초저녁부터 맥주를 거나하게 마시며 몰래 소주까지 타 먹던 우리 팀원들은 조금씩 혀가 꼬부라져있었다. 얼굴이 벌게져 딸꾹거리다 잠이 든 팀원, 몇 차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한 팀원들도 여럿이었다. 술을 취하도록 마셔본 적이 없다던 해외대 출신 신입사원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우뤼~ 사이닝 보너스(입사 축하금) 왜 안 줘요? 왜 신입사원 연봉은 다 똑같이 '*천 100만 원' 이죠?"

그가 판도라의 상자를 거침없이 열었다. 얼굴이 벌게져 눈이 풀린 여자 신입사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 나는 *천만 원인데?" 또 다른 남자사원은 *천 100만 원이라고 했다. 혀가 꼬인 서너 명이 외치는 숫자와 내 연봉을 종합한 결과 남자 신입사원은 여자 신입사원보다 연봉이 100만 원 높았다. 아직 취하지 않은 이들의 머릿속 계산기가 바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술이 확 깼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를 주도하던 오락부장 타입의 사원들이 잽싸게 다같이 건배와 파도타기를 외쳤다. 쓰린 속을 감추려 덜 취한 여성 팀원들도 과장되게 맥주 파도타기에 몸을 맡기며 면구한 상황을 넘겼다.


분명히 공채 최종 합격 후 근로 계약서를 작성할 때, 인사팀에서 신입사원은 동일 연봉이며 대학원 학력을 연봉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남성 신입사원끼리, 여성 신입사원끼리 동일 연봉이었다니.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외치며 임원들 앞에서 재롱을 떨던 신입사원의 애사심은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간 봤던 수많은 기사들을 떠올렸다. 원래 남녀 임금격차는 존재하는 거 아닌가. '그래, 군필자들은 원래 대부분의 기업들이 연봉을 높게 준다지.' 체념하려는 찰나. 내 안의 꼰대력이 폭발했다.


'저 새끼 군 미필자인데? 대학원 나온 나보다 더 받는다고?'


미국에서 태어나 국적도 미국인이며 해외 대학을 나왔다던 최초 연봉 유포자. 그리고 눈이 안 좋아 군면제를 받았다던 그 옆의 남자 동기가 회사생활 시작부터 나보다 돈을 더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군대에서 200원도 안 되는 시급 받으면서 2년 구르다 온 거에 대한 보상이라면 그렇다 쳐'라는 생각까지 했다. 인사팀에서 연봉은 발설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이거였나. 급격한 애사심 저하와 입사하자마자 사직서를 쓰고 싶어 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나 보다. 주는 대로 받기만 한 남자 사원들도 무슨 죄가 있나. 의사 결정권자들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내리사랑, 동성 사랑 아니겠는가.


사실 연봉 100만 원에 세금 떼면 월 8만 원 남짓을 남자 동기가 더 받는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불평등이다. 세상에서 남녀 임금격차가 가장 높은 국가에서 사는 여성은 시작점부터 영문도 모른 채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아야만 한다. 차라리 군필자에 대한 입사 축하금(사이닝 보너스)을 지급한다면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꽁꽁 숨겨서 남성 사원들의 손에만 쥐어준 영문 모를 백만 원. 시작부터 차이나는 100만 원은 점점 더 가파른 격차를 만든다. '연봉의 150%'처럼 보통 보너스는 연봉을 기준으로 지급된다. 또한 승진과 이직을 할 때 연봉 협상 시에도 기존 연봉과 성과급에 일정 퍼센트를 적용해 계산한단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 9월 한국노총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남녀 임금격차는 37.1%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고 한다. 여성의 근속연수가 짧고 경력단절 현상이 사회에 만연해 있으며, 여성 임원의 비율이 3%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입사원부터 석사 출신 여성이 학사 출신 남성보다 임금이 적은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군 미필이 흠이 아닌 걸 알면서도 연봉이 낮은 것에 대한 분탕질을 할 대상으로 군필 여부를 움켜잡은 내가 처량할 따름이다. 여성뿐만 아니라 석사 출신 남성도, 군필 남성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이 억울함은 속으로 꾹꾹 눌러야만 했다. 인사팀이나 부서장에게 왜 내 연봉이 낮냐고 따지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를 오픈한 해외대 출신의 남자 동기를 지옥으로 보내는 꼴이니. 남자 동기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더 악착같이 일하면서도 사람 좋게 웃으며 사내 평가까지 신경 썼다. 바보같이 조직에서 유능함을 인정받으면 그걸로 연봉 100만 원 덜 받는 서러움이 풀릴 줄 알았다.


회사생활을 하며 눈에 보이는 숫자로 차별받는 건 양반임을 깨달았다. 사내에서 남성들은 철옹성 같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있었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한 것을 축하하는 회식이 밤 11시 넘어 끝나고 "2차는 늦었으니 남자만 갑시다!"라며 배려 같은 배제를 당했다. 늦게까지 술 마시는 것보다 일찍 가서 쉬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여 사원들만 등 떠밀려 집으로 가는 게 마음이 편치 많은 않았다. 어디서 회식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후에 주요 업무는 남자 신입사원들이 차지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휴직 및 시간 선택제 근로자, 단기 근로자까지 포함된 통계청의 <남녀 취업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 자료엔 여성의 평균 근로 시간이 남성보다 낮다. 하지만 OECD에서 남녀 임금격차를 발표할 때는 1년 이상 정규직으로 근무해 퇴직금과 상여금을 지급받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계산을 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보다 근로시간이 적기 때문에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주장은 근거 자료를 잘못 활용한 그릇된 주장이다.


그제야 눈을 들어 위를 볼 수 있었다. 회사 본부장 중에 여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배가 부른 채 회사에 다니는 여사원들은 임원진의 비서 또는 인사팀 직원 정도였다. 누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결혼 후 여사원들이 제 발로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만 봤다. 임신과 출산 때 눈치 보며 육아휴직을 쓰고 조직에서 버텨도 승진도, 임금인상도 없으니 유능한 여성들이 회사를 떠나기로 선택한 거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성평등 임금 공시제'를 시행한다고 했으나 더불어민주당에서 발의한 관련 법안은 아직 국회 계류 중이고, 서울시에서 올해(2019년) 5월부터 이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성별뿐만 아니라 국적, 인종, 비정규직, 임시 근로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가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았으면 좋겠다. 결국 서로에게 악감정을 만드는 건 개인이 아닌 제도였다. 쪼잔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연봉 100만 원 차이가 한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만드는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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