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까지 동생과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우리를 가르쳐 주셨다. 주간 학습지 눈높이나 구몬 CF만 봐도 머리가 아프고 자리를 피하고 싶은 부작용을 얻긴 했지만. 초등학교 때는 받아쓰기나 수학 경시대회 시험이 끝나면 엄마와 시험지를 함께 보면서 오답의 이유를 함께 찾았다.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 중간고사가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와 식탁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그날 본 시험지를 살펴봤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가 첫 중간고사를 치를 때였다. 시험 기간 막바지.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과목들의 시험이 끝나고 기술가정과 예체능 과목들의 시험을 치른 날이었다. 성실하게 요점을 암기했다면 고도의 사고 과정 없이도 답이 보이는 합리적인 문제 유형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무려 5점 자리 객관식 문제 하나를 틀렸다. 그는 왜 틀렸는지 모르겠다며 입을 삐죽였다.
식탁에 시험지를 놓고 간식을 먹고 있는 동생 앞에서 시험지를 보던 엄마가 커피를 뿜을 뻔했다. 엄마는 큰 소리로 웃다 울 지경이 됐다. 궁금해진 나는 엄마에게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었다. 엄마는 이것 좀 보라며 동생의 시험지를 보여줬다.
다음 중 여성의 2차 성징에 따른 신체 변화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르시오.
① 유방이 발달한다.
② 월경을 시작한다.
③ 몽정을 한다.
④ 수염이 자란다.
⑤ 변성기가 시작된다.
"아니 이건 공부 안 해도 아는 거 아니야?"라고 동생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동생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술가정 문제가 너무 쉬워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험 시작 10분 만에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고 한다. 동생 역시 빠르게 답을 체크하고 눈을 좀 붙였다. "15분 남았다."는 시험 감독 선생님의 부름에 부스스 눈을 뜬 동생. 최종 답안 마킹 전에 쭉 문항들을 되짚어 보는데.
옆에서 나는 부스럭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여자아이의 인중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보이더라는 거다. 그때부터 동생은 고민을 시작했다. '수염이... 나는 건가?' 한동안 내적 갈등을 하다 동생은 용기 내 다시 한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다른 여자아이의 입술 주변도 거뭇하게 수염이 나 있었다고 한다.
화룡점정은 엄마가 겨드랑이 털 제모를 위해 화장실에 놔둔 여성용 면도기를 떠올린 거였다. 동생은 그때 확신했다고 한다. '아, 여성은 2차 성징 때부터 수염이 나는구나!' 그래서 자신 있게 무려 3개의 답, ①번, ②번 그리고 ④번을 추가해 마킹했단다. '역시 5점 자리 문제라 까다롭군.'이라고 생각했으나 정답을 맞혔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그런데 시험을 마치고 반장이 교무실에서 받아온 답지엔 정답 항목은 단 두 개뿐이었다.
억울한 동생은 기술가정 선생님을 찾아갔으나 선생님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교과서를 찾아보라고 했다. 나와 엄마는 바닥을 치며 깔깔댔다. 그러고 보니 사춘기에 접어든 여학생 중 인중이 거뭇하게 잔털이 돋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인중 부분에 수염이 난 여자들이 꽤나 있다는 걸 여성들은 더 잘 알 거다.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고 여성의 인중에 나는 털은 대부분 두껍지 않아 많은 여자들이 흔적도 없이 제모를 하는 거다. '2차 성징'에 포함되는 수염의 기준이 생각보다 높았던 걸까.
아무튼 당시엔 배가 아프게 깔깔대는 엄마와 나를 보며 동생은 끝까지 웃지 않고 간식을 먹다 이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2차 성징이 오지 않아 하얗고 보송한 자신의 인중을 매만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