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시간 맴도는 말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듣는 이 가슴에 박힌다. 심지어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배우를 꿈꾸는 친구가 울며 말했다. 엄마가 자기에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거다.
라고 했단다. 차라리 배우를 하지 말라는 것보다 더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전해 듣는 내 심장마저 저릿할 정도로 아픈 말이었다. 마음속에 꿈틀대는 꿈에 살충제를 뿌리는 냉정한 사실 한마디.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의 만류를 뒤로한 채 그녀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만 붙들고 서울에 왔다.
반지하 방에서 삼각김밥을 먹으며 간간이 들어오는 작은 광고 촬영 건, 단역 출연 등을 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초반엔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될 정도로 수입 없이 가난했다. 연락도 잘 못하는 부모님은 시골에 계시고 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고아와 다름없었으나 꿈을 품은 그녀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높이 들고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네 관광호텔 카운터에 취업해 모은 돈 300만 원만 들고 온 그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예쁘기로 옆 마을까지 소문났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어머니를 도와 새벽부터 밭이랑에 쭈그려 앉아서도 텔레비전에서 춤추고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동네 어른들이 서울서 법관을 한다는 친척집, 건물이 몇 채 있다는 집안에 소개해준다고 해도 모두 거절했다. 부모님은 부잣집에 시집가서 편히 살지 왜 사서 고생이냐며 그녀의 꿈을 이루지 못할 허황된 욕심 정도로 여겼다. 소녀에게 세상은 두드리면 열리는 곳이었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곳이었다. 주변 모든 사람이 시골 출신이 연예계에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할 때마다 소녀의 내면은 더 단단해졌다.
자존심 강하고 대가 굵은 그녀도 서울에 오니 발가벗고 다니는 것과 같았다. 경제적 안전망은커녕 따뜻한 밥 한 끼로 응원해줄 가족도 없이 꿈을 이루려 온 소녀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그녀를 지켜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키워주겠다던 작은 소속사에 들어갔으나 술자리를 가장한 접대를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아리따운 그녀의 스폰서가 되어주겠다는 철부지 재벌 3세의 면전에 정신 차리라고 일침을 놓은 그녀를 몰랐나 보다. 눈 딱 감고 술 한잔 따르는 게 뭐 그리 어려우냐는 소속사 대표에게 배우의 일이 아닌 걸 강요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가족도, 소속사도 그 누구의 도움 없이 꿋꿋하게 꿈을 향해 걸었다. 그녀는 내리치는 비바람을 맨몸으로 맞으면서도 악착같이 피팅모델, 단역, 개업 행사장 내레이터 모델 등 돈 되는 일을 했다. 산재보험 등 근로자를 위한 기본적인 보호도 받지 못해 모델일을 하다 뜨거운 조명에 화상을 입거나, 발에 잘 맞지 않는 높은 신발을 신고 춤추다 발목을 다쳐도 치료비 한 푼 보상받지 못했다.
모은 돈을 대부분 월세와 병원비로 써버린 그녀는 버스비가 없어 걸어서 촬영지로 갈 때도 있었다. 단역배우 업계 관행이던 임금 체불이나 떼먹기를 하려는 에이전시 사장에게 그녀가 불같이 화를 냈다. 다른 배우 동료들이 계속 또 일거리를 받으려고 눈 감는 악습이었다. 그녀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 악을 쓰며 항의했다. 정당한 것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모델 인력소개 에이전시 대표나 광고주들은 "이 바닥 좁다.", "이 바닥에서 소문 안 좋게 나면 일 못한다." 따위의 협박을 해댔다. 그런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악착같이 일해 돈을 모았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마사지를 받거나 피부과를 다니며 외모 가꾸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소속사가 있었다면 조금은 편했겠지만 그녀는 대표의 비위를 맞추거나 소속사 선배들의 눈치를 보는 일도 싫다고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거친 세상의 화살을 온몸으로 쳐내던 그녀에게 어머니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거다."라고 한 거다. 꿋꿋하게 꿈 하나만 향해 가는 딸내미에게 어머니는 왜 그리 모진 말을 했을까. 듣는 내가 다 서러워서 같이 울었다. 그녀는 당신의 어머니가 중학교도 졸업 못했고 농사만 해서 뭘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라고 했다. 나도 "그래그래." 하는 추임새와 함께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송충이는 솔잎을 안 먹어도 된다는 걸, 우리는 송충이가 아니란 걸 증명해 보이자며 파이팅을 외쳤다.
탈 송충이 결의 후 3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무렵
할 만큼 했다며 그녀가 체념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오디션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배우 일은 단역 들어오는 것만 하면서 큰 쇼핑몰의 피팅모델 등 수입이 높은 일만 받았다. 오랜 시간 시도 때도 없이 내 귀를 울리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이 그녀와 오랜만에 밥을 먹으며 점점 크게 맴돌던 참이었다. 연기학원을 그만두니 수입이 좀 안정돼 돈도 더 잘 모이고 전에는 비싸서 미뤘던 피부과 시술도 받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모두 건강히 잘 계시냐며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인사치레처럼 물었다. 사실 묻고 싶었던 건 송충이 발언의 파문이 그녀의 삶에도 나처럼 짙게 물들었는지가 궁금했는데. 아버지는 고된 농사일에 허리 디스크가 고장 나 치료비를 보내드렸고, 동생은 그녀가 젊음을 녹여 번 돈으로 이사한 강남의 작은 빌라 2층에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걷는 것을 즐겼던 그녀와 나는 밥을 먹고 한강 주변을 두 시간 여 걸었다. 말이 많지 않은 우리는 보통은 침묵하고 간간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녀와 나는 주파수가 잘 맞았다. 굳이 말이 비는 시간을 소리로 채우려 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걸으며 각자의 마음에 부산하게 일렁이던 힘겨운 세상살이 일들이 가라앉을 때쯤.
"언니. 나 이제 엄마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된ㄷ..."
"나도!"
생각이 많아 대답을 잘 못하는 편인 나인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장구를 쳤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녀와 그녀 어머니만의 공간에 어떤 변화가 일었는지 알기 전엔 섣불리 끼어들 수 없었다. 그녀는 엄마의 말에 너무나 화가 나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했단다. 나도 당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지배자들에게 이용만 당한다!!"류의 개똥철학을 일기장에 쓰며 분기탱천했더랬다.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안 풀릴 때마다 내 속에서 떠오르는 말에 분풀이를 했다.
당시 매번 언론고시에 낙방하던 나에겐 곱씹을수록 화가 나는 말이었다. 난 그동안 뭐가 안 풀릴 때마다 "난 송충이가 아니야! 세상아 너가 뭔데 날 송충이라고 하느냐! 난 사자다!"라고 속으로 외치던 때였다. 3년이란 시간 동안 보호막 없이 거친 세상에 온 몸으로 맞선 그녀의 사유는 나를 한 발 앞서 있었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엄마가 저런 생각을 하니까 농사나 짓고 사는 거라고 생각을 했단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무너뜨린 일이 있었다. 그녀가 유명 배우들이 여럿 나오는 영화에서 꽤나 큰 배역을 따냈을 때였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세 번의 오디션을 마치고 대본 리딩을 할 때 현장에서 감독이 그녀에게 물었단다.
여기 정사신이 추가됐어. 노출이 있는데 괜찮지? 앞모습은 가슴까지 뒷모습 전체 누드로.
모든 배우와 스텝의 눈이 본인에게 쏠린 그때 그녀는 울음이 터졌다. 감정보다 앞서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고 한다. 그녀가 그동안 악착같이 번 돈으로 연기학원을 다니며 인간의 모든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웠는데 이상한 일이다. 성관계 역시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일 경우가 많아 배우라면 당연히 섹스도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전 협의 없이 당연히 벗으라는 무례함에 화가 났고 촬영장에 가더라도 도저히 벗을 용기가 안 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몇 년 동안 노력해 힘들게 얻은 기회를 떠나보냈다.
그제서야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힘들게 따낸 배역을 포기하겠다고 캐스팅 담당자에게 전화하던 날. 매일 새벽 시끄러운 닭 우는 소리를 시작으로 아버지가 호통치며 비닐하우스로 데려가던 지난 일상이 그녀를 살렸다. 그녀가 외면했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엉엉 울며 집으로 내려갔다. 방에 들어가 누워만 있는 그녀를 어머니는 말없이 보시다 밥을 차리곤 먹으라고 하셨단다. 어떤 일을 당해도 기죽지 않던 큰딸이 서울로 간지 3년 만에 파김치처럼 풀이 죽은 걸 보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릴 때부터 시골 작은 마을에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일상처럼 일어나는 부당함에 부모님을 대신해 옆집과 윗집에 따져야 직성이 풀렸던 그녀였다. 힘없이 밥상 앞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키가 크고 두상이 작은 그녀에게 승무원을 권하던 선생님을 향해 "나는 전지현 같은 배우가 돼서 돈 많이 벌 것."이라고 했던 그때를 포함해. 가슴에 품은 '배우'라는 꿈이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과 선택의 기준이었다. 오랜 시간 그런 그녀를 지켜본 어머니는 말해주지 못할 아픈 미래를 보고 있었나 보다.
어머니는 그녀가 배우는 이제 그만 할 거라고, 직업 모델로 전향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입을 여셨다. 당신의 딸이 진짜 연기하는 배우를 꿈꿨다면 아무 작품에서도 딸을 써주지 않을 때 작은 극단에라도 들어가지 않았겠나 싶었더란다. 모델 일을 하면서 꽤 높은 시급을 받고 필요 이상의 돈을 벌어 피부과나 마사지샵에 다니며 재산을 불리는 데 집중하는 딸이 안타까웠다면서. 당신이 낳아 기른 딸내미가 자존심을 꺾고 생의 밑바닥을 연기할 배우가 될 성격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셨다. 게다가 자존심 강하고 대쪽 같은 성격의 그녀가 수많은 이에게 허리를 숙이고 비위를 맞추는 일엔 젬병일 거라는 걸 아셨을 거다. 학력 그리고 직업과는 상관없이, 서울 살이를 한 번도 안 해본 삶의 경력과는 무관하게 어머니는 당신 딸의 본성과 생활 방향이 진정한 연기자와 결이 달랐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거다.
나의 어리석은 지난날 역시 뜻대로 안 되는 인생으로 응어리진 마음에 말 한마디를 꼬투리 잡고 씩씩댔다. 기자 업무의 본질은 글쓰기만이 아니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여러 성향의 사람들과 적이 되지 않고 사실을 길어내는 거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탈진상태가 될 만큼 에너지를 소모하는 나인데 그걸 무시하고 기자가 되겠다고 발악을 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만 부어대면 취재원에게 편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도 강했다. 아마도 최종 면접의 임원진들은 나의 이런 내면을 꿰뚫어 봤을 거다. 당시 기자는 하고 싶지만 사람이 두려웠다. 내 어머니는 송충이 같은 비유를 쓰지 않으셨다. "너 기자 할 성격 아니다." 라며 굵직한 카운터 펀치형 직언을 날리셨다.
초졸 농사꾼 어머니가 삶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며 길어 올린 통찰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우리는
괜히 어머니의 학력과 농사꾼이라는 직업에 편견을 씌워, 옳은 말씀을 발버둥 치며 거부했다. 신기한 건, 옳은 말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어머니의 말은 늘 우리의 귓가를 맴돌았다. 우리는 이제 이 말에 담긴 명쾌한 통찰을 곱씹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상처 입고 성장했다. 삶의 밑바닥과 굴곡을 겪고서야 그녀의 어머니가 삶의 고통을 겪으며 빚어 사리처럼 품은 진심을 이해했다. 어머니의 말씀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 한대로, 백 없는 사람은 백 없는 대로 살며 도전하지 말라는 편협하고 공격적인 뜻이 아니었다.
내 본질을 숨기고 운 좋게 성공해도 언젠가는 탈이 나는 법이다. 나의 내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파악하려면 수많은 일을 겪어야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보다 내가 가장 편안한 상태로 삶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니까. 그녀는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이제는 전지현처럼 유명해져서 돈을 많이 버는 배우가 말고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는 배우가 되고 싶단다. 맞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