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바닥에 떨어진 건포도 두 개.
내 가슴입니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은 침대가 아닌 내 가슴 이야기였어요. 2차 성징은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거 아닌가 했죠. 여성이라면 키가 자라듯 당연히 가슴도 솟아오르는 건데 말이에요. 친구들이 하나둘 교복 등판에 선명한 후크자국을 새기며 브래지어를 입기 시작할 때. 저는 굳이 위에도 속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섯 살 여자아이의 몸에서 변하질 않는 겁니다. 그때부터 가슴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시선은 늘 여자들의 그곳을 향했습니다. 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물결처럼 미세하게 일렁이는 친구들의 교복 안 속살을 흘깃거리며 훔쳐봤습니다. 한 달에 두 번은 목욕탕엘 가는 할머니와 이모들을 따라갈 때도 내 눈은 늘 거기. 모두의 가슴에 가 있었어요.
외할머니도, 이모들도, 엄마도 모두 생물 교과서에서 본 여자의 몸이었는데. 왜 나만 안 생긴 걸까요. 양손을 쇄골부터 배꼽까지 왔다 갔다 쓸어봐도 평평해서 걸리는 게 없는 내 몸. 절벽 가슴이 싫다는 저에게 이모들은 예쁜 발레리나의 몸이라며 위로했습니다만. 듣기 싫었고 억울했습니다. 유아 빼고 목욕탕의 모든 여자들이 대가 없이 얻은 신체기관이 나에게만 없으니까요. 세일러문, 인어공주, 미미와 바비 인형도 심지어 암놈 침팬지도 젖가슴은 당연히 달렸잖아요.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에요. 자두알 만큼만 지방이 쌓이길 기원했습니다. 엄마는 “남들보다 첫 생리가 늦어서 그럴 거다.”라며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첫 생리를 중3 때 했으니 2차 성징이 늦나 보다 할만했죠. 달마다 붉은 피가 꽃처럼 번질 때쯤 복숭아처럼 부드러운 가슴이 솟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정확한 생명의 시간에 맞춰 안 쓴 난자가 피와 엉킨 자궁과 함께 몸 밖으로 밀려 나와도 가슴만은 그대로였습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절대 불가능한 게 있다는 것, 타고난 신체적 한계에 무릎 꿇을 때 열패감은 상당했습니다. 턱걸이와 앞구르기, 영어단어와 한문 외우기에 가창 시험도 연습하고 또 하면 기준 성적을 받았는데. 왜 내 가슴은 열심히 딸기 우유를 먹고, 마사지를 하고, 주먹을 꼭 쥐고 팔을 접어 닭날개처럼 3-6-9-3-6-9를 외치며 퍼덕여도 절벽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유두를 보는 제 가슴은 타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제 가슴을 밤낮으로 쳐다보며 좌절하는 것도 잠시였어요. 의학기술로 모든 종류의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대학교에 가자마자 바로 수술을 할 거라고 선언하고 열심히 공부만 했습니다. 부모님은 설마 쟤가 진짜 가슴 확대를 할까 싶으셨데요. 모든 여성의 쇄골 아래를 보며 3초에 한 번씩 가슴 생각을 하는 딸내미의 세상이 유방으로 가득 차있었음을 부모님도 모르셨겠죠. 대학교에 입학하고 1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끈질기게 부모님을 괴롭혔습니다. 눈 뜨자마자 기지개를 켜면서, 밥상에서 밥을 먹다, 산책을 하다가도 뜬금없이 대화 주제는 가슴으로 시작해 수술로 끝났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 5년 넘는 투쟁은 결국 성형외과 수술방에서 결실을 맺었어요. 혹시 보형물이 터지거나 내용물이 새 나가도 안전하다는 식염수를 선택했습니다.
수술하자마자 바로 찜질방에 가리라 결심했습니다. 두 다리가 걸으며 만드는 파동대로 살랑이는 가슴, 고개를 살짝 숙이면 보일랑 말랑 한 가슴골이 그렇게도 갖고 싶었어요. 사이즈 큰 브래지어를 차면 세상이 바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예상은 늘 빗나갑니다. 마른 몸을 돈으로 부풀린 결과, 가슴이 방바닥 위에 엎어놓은 밥공기 두 개가 돼버렸습니다. 누가 봐도 어색한 모양이라 오히려 목욕탕에서 옷을 벗기가 힘들었습니다. 촉감 역시 두꺼운 차량용 타이어를 사과만 하게 만들어놓는다면 딱 식염수로 채운 가슴 같을 거예요. 수 많은 비포-애프터 사진 속 자연스럽게 처진 곡선을 그리는 가슴, 손으로 아무리 주물러도 수술한지 모르게 자연스럽다는 수술결과는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자리에서 여자 동기가 술 취한 척하며 자연스럽게 제 가슴을 팔뚝으로 툭 몇 차례 치더라고요. 자주 각종 시술과 보톡스 등을 대화 주제로 삼는 여자 동기들은 저를 글래머라며 칭찬했지만 사실 눈치챘을 거예요. 여전히 제 가슴은 흔들림이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힘든 건 매 순간 느껴지는 이물감이었어요. 갈비뼈와 살가죽 사이 볼링공이 들어있는 것 마냥 아프고 답답하더라고요. 그리고 첫 남자친구와 키스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이 처음 가슴으로 간 순간. 부자연스러운 촉감에 둘의 성적 흥분은 바로 멈췄어요. "왜 이렇게 가슴이 딱딱해?"라고 제 눈치를 보며 묻는 말에 사기꾼이 된 것 같고 어디서부터 말해야하나 싶어졌죠. 물론 두 번째 연애부터는 손이 가슴에 닿기 전에 말을 했지만요.
고통스러운 가슴 수술로 얻은 건, 지나가는 사람이 몸매 좋다며 잠시 D컵을 꽉채워 볼록한 그곳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는 만족감 정도였어요. 이렇게 12년동안 내 살과 맞닿을 일 없는 거리감의 사람들에게만 몸매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았을 뿐, 진짜 벗은 몸은 감춰야 했습니다.
더이상은 물주머니를 감당할 수 없었어요. 다시 수술대에 누워 물주머니를 빼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문에 가깝게 스스로를 괴롭히다 보니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어릴 때부터 내 몸을 비정상이라고 단정 지었더라구요. 밑도 끝도 없이 내 가슴이 싫었고 부끄러웠으며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었어요.
몸과 마음을 참 오랜 시간 괴롭혔어요. 내 눈은 늘 다른 이들의 가슴을 향했어요. ‘내가 나를 사랑해야 다른 사람들도 나를 사랑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 말을 실천하는 과정이 쉽지 않더라고요. 본능적으로 봉긋한 가슴에 반응하는 나를 매 순간마다 토닥여야 하니까요.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사랑하기.’가 생각보다 힘든 일임을 온몸으로 깨달았네요.
오랫동안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던 제 몸에게 늦었지만 사과했어요. 이제야 평평한 내 가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특히 풍만한 가슴으로 태어났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아직 가끔 하지만요. 여전히 뽕브라가 없으면 몸에 붙는 옷을 입지 못하는 저예요. 그래도 도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타고난 모습 그대로 나와 타인을 인정하자는, 특히 여성의 신체를 규격화하지 말자며 서로를 격려하는 시대 흐름도 저를 응원하네요. 무엇보다도 내 고정관념으로부터 내 몸이 자유로워지는 날. 원래 필요 없었던 브래지어를 벗고 아이 같은 가슴으로 자유롭게 뛰어다닐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