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밝고 명랑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주의 은혜라.
나는 글을 쓴다.
글은 나와의 대화이고 삶을 되새기는 소중한 과정이며 추억 속 아직도 헤매는 나를 다독이고, 타이르고, 위로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추억을 글로 쓰다 보면, 그때의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원하진 않았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참고, 견디고, 즐기고, 이겨내면서 느꼈던 복잡했던 감정들이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상황 속에서도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은 내가 살던 그 집들에 관한 추억을 남겨보려고 한다.
각각의 집에서 겪었던 소소한 일상,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따뜻함을 떠올리면, 그때 그 순간들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나의 삶의 작은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져 더 깊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유년기를 보냈던 나의 구만리.
아빠가 일하러 가시면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모여 뜨개질을 하며 부수입을 만드셨다. 그 모임의 아줌마들 자녀들과 우리 세 자매는 논두렁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매일 논두렁에서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일렬로 논두렁을 행진하던 기억은 선명하다. 구만리에서 어느 집에 살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이 함께 웃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던 그곳은 희망이 꽃피던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다.
우리 동네에 가끔 뻥튀기 아저씨가 오셨다. "뻥이요~" 하는 외침과 함께 귀가 먹먹해질 만큼 "펑!"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면, 뻥튀기 조각들은 금빛 작은 별들처럼 흩어졌다. 땅에 떨어진 작은 별들을 입에 넣고, 침으로 녹여 삼키는 상상을 하며 숨을 죽인 채 바라보면 고소한 향기가 더욱 입맛을 돋웠다.
어느 날, 얼굴은 하얗고 둥글고,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가던, 매일 코를 흘리던 일규가 떨어진 뻥튀기를 주우러 기계 가까이 다가갔다가, 뻥튀기 기계가 펑 터지며 화염에 얼굴에 화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일규는 가끔 내가 속상해할 때 나를 안아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어색해서 무안하게 뿌리쳤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진심으로 다가와 위로해주려 했던 일규의 따뜻한 마음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구만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절골 마을이 나온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했다. 왜 '절골'이라 불리는지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모른다. 마을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을 입구의 평지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커다란 느티무가 서 있고, 그 아래 내려다보면 넓은 논 한편에 비닐하우스가 있다. 그 비닐하우스가 우리 집이다. 세 칸 중 두 칸이 아빠의 가구 공장이었고, 나머지 한 칸이 우리가 실제로 사는 공가이었다.
화장실은 집 안이 아닌 바깥에 있었다. 땅을 파고 큰 다라를 땅에 묻은 뒤 그 위 양 옆에 나무판자를 걸쳐 놓았고 볼일을 볼 땐 나무판자를 밟고 앉아 볼일을 보는 구식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옆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었는데 화장실 위에 무성하게 가지가 뻗어 있어서 5월에서 6월 사이 검고 동그란 열매가 떨어져 신발 바닥을 물들이곤 했다. 구식 화장실의 고약한 냄새와 짓이겨진 벚나무 열매 자국은 최악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는 절골에서 버스로 여섯 정거장 떨어져 있었지만, 직행 버스가 없어 장흥에서 한 번 갈아타야 했다. 절골에서 장흥까지 가는 녹색버스는 배차 시간이 40분, 장흥에서 학교까지 가는 36번 버스는 20분이었다. 게다가 녹색 버스는 자주 지연돼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린 적도 있어서, 우리 세 자매는 종종 장흥까지 걸어간 뒤 36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곤 했다.
하굣길에는 가끔 차비로 아이스크림 사 먹고, 친구들과 철길을 따라 집까지 걸어오기도 했다. 어느 날 청소 당번이 늦게 끝나 친구들은 먼저 집에 가고, 혼자 철길 따라 걷고 있었다. 그때 발바리 검둥개 한 마리가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혼자라 심심했기에 그 강아지가 반갑게 느껴졌다. 내가 뛰면 같이 뛰고, 뒤돌아보면 슬쩍 딴청을 피우다가도 다시 나를 쫓아오는 모습이 신기했다. 한참을 걷다 멈춰 뒤돌아보니, 개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땅에 있는 뼈다귀로 놀고 있었다. 나는 그 뼈다귀를 집어 들고 다시 뛰었고, 검둥이는 내 집까지 따라옸다. 그렇게 발바리는 우리 집의 검둥이가 되었다.
검둥이와 나는 집 앞 논바닥을 뛰어다니며 단짝이 되었다. 검둥이는 우리 집에서 두 번이나 새끼를 낳았고, 세 번째 새끼를 기다리던 어느 날 윗집 남신이네 강아지에게 배를 물려 새끼와 함께 죽었다. 나는 그날 엉엉 울며 검둥이를 묻어 주었고, 아직도 내 어린 시절 유일무이한 친구로 가슴속에 남아있다.
절골에 친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윗 집에 사는 은숙이가 있었는데, 은숙이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은숙이와 함께 자장면을 사주시고 집을 떠나셨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은숙이네 집 앞에는 커다란 앵두나무가 있었는데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앵두가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은숙이네 앵두나무가 인상 깊어서 집 앞마당에 앵두나무 심는 게 아직도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다.
은숙이네 놀러 가면 늘 편치 많은 않았다. 은숙이 할머니가 나와 은숙이를 비교하며 자주 혼내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은숙이는 마음씨가 착하고 속이 깊은 친구였다. 책도 좋아해서 항상 책을 들고 다녔데 둘이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책 이야기도 나누며 글도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쉽다.
어느 날부터 우리 아빠가 매일 학교까지 데려다주시기 시작했고, 은숙이는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등교했다. 은숙이는 일찍 우리 집에 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방을 메고 방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은숙이 모습이 기억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은숙이에게 유세를 떨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친구를 소중하게 대하지 못했던 나의 경솔함이 안타깝다.
그때 머릿니가 유행이어서, 엄마는 하교 후, 밝은 낮에 머리를 숙여 놓고 참빗으로 하나하나 살핀 뒤 이를 잡아주셨다. 하지만 은숙이는 그렇게 관리를 받지 못해 늘 머릿니 서캐를 달고 다녔다. 나는 은숙이가 창피해서 점점 거리를 뒀지만, 은숙이는 늘 나를 챙겨주고 배려해 주고 아껴 주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어린 마음이 지금도 아쉽다.
아빠는 가끔 술을 드시면 화를 내시며 집안 물건을 마구 부셨다. 그럴 때면 엄마는 산속으로 숨으셨다가, 아빠가 잠들면 돌아오셨다. 나는 다음날 학교를 다녀온 뒤 집에 돌아왔을 때 혹시 엄마가 도망간 건 이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급히 귀가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엄마는 늘 곁에 계셨다. 참 감사한 일이다.
아빠는 엄마를 절대 때리진 않으셨지만 물건을 많이 부수셨고, 부서진 물건은 다음 날 새것으로 사다 놓으셨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실 때면 우리를 작은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셨고, 밖에서는 '쿵쿵 쾅쾅' 소리와 엄마의 슬픈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절골은 내게 그저 구질구질한 기억들만 남아 있는 곳이다.
중학교 시절, 우리 가족은 보광사로 이사했다. 고양동에서 보라빌라를 지나 군부대를 넘으면 커다란 주유소가 있는 정거장이 나오고, 거기서 내려 개천을 건넌 뒤 돼지우리 옆에 자리 잡은 공장 겸 집이 우리 집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벽돌 건물로 발전했다. 공장 출입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면 거실이 있고, 바라보는 면에 방이 2개 있는데 왼쪽은 우리 세 자매방이고, 오른쪽이 안방이었다.
우리 세 자매 방 안에는 책상 세 개와 침대 세 개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보광사에 사는 동안 온갖 자연재해를 겪었다. 맑은 날 번개가 두꺼비집을 강타했던 적도 있고, 폭우가 쏟아져 수해도 맞아봤다. 아빠는 트럭에 실린 가구를 단단히 묶기 위해 장롱 위로 올라가셔서 밧줄을 당기다 추락해 대동맥이 끊어지는 큰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옆 건물이 스티로폼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불이 나 우리 공장으로 번져서 불이 공장을 뒤덮은 적도 있다.
비가 그친 다음 날이면 돼지 냄새가 진동해 코를 막으며 숨 참고 뛰어서 지나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공장 집주인아저씨는 나를 많이 이뻐해 주셨는데 나는 그분이 느끼해서 피해 다녔던 기억도 난다.
보광사에서 의정부 중학교까지는 버스로 통학했는데, 집에서 버스 타고 고양시장에 내려서 절골에 살 때 자주 지연되던 그 녹색버스를 타야만 학교에 갈 수 있다. 길가에 서서 목을 빼고 기다리던 날이 많았다. 길게는 1시간 가까이 버스를 기다렸다. '부모님은 왜 이렇게 학교를 멀리 보내서 나를 고생시키셨던 걸까? 차라리 주소 좀 옮겨서 서울로 학교 다니게 배려 좀 해주실 순 없었던 걸까?'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집까지 운행하는 학원 셔틀이 있어 하교 후에는 한동안 편하게 다녔지만, 탈 때마다 "먼 길 간다"며 불편을 드러내시던 기사님을 이해하는 일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아빠 공장이 커지면서 외국인 노동자가 늘었고, 집 거실에 모여 월급을 정산하던 거래처 아저씨와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사적인 공간이 사라진 것 같아 불편했다.
엄마는 작은엄마와 함께 공장 식구들의 점심을 직접 준비하셨다. 방학 때는 점심을 늘 공장 아저씨들이 먼저 드시고 난 뒤에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작업복에 묻은 먼지만 털고 바로 밥을 먹으니 발에서 냄새도 나고 먼지도 바닥에 그대로 남아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데 아빠가 깨우셨다. 내려오자 방 안에 물이 발목까지 차 올라 있어 우리는 창문을 통해 급히 대피했다. 다음 날 집에 돌아가 보니 산사태로 나무가 집 안까지 쓰러져 있었다.
결국 우리는 당숙 댁에서 며칠 지낸 뒤 이사하게 되었다.
그즈음 학교에 헌혈차가 왔는데, 전화카드와 빵을 준다길래 친구와 함께 헌혈하러 들어갔다 침수 지역 주민은 말라리아 위험 때문에 헌혈이 거부되어 민망하고 속상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보광사를 떠올릴 때면 돼지 냄새, 더러운 도랑, 다양하고 끊임없는 자연재해가 함께 떠오른다.
학교가 끝난 어느 날, 아빠가 "이사 갈 집 한 번 가보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함 참을 달려도 내리라는 말이 없어서 "아빠, 너무 멀어요!"하고 투정했지만, 마침내 도착한 곳은 삼층짜리 빌라였다. 태어나서 처음 발을 들여놓는 빌라라서 내 마음은 순식간에 흡족해졌다. 빗줄기가 거세게 몰아쳐도, 3층에 물이 찰 일은 없을 테니 그 생각만으로도 맘에 쏙 들었다.
아빠는 집 근교 고골에 공장을 얻어 엄마와 함께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셨고, 이후 더 크고 넓은 공간으로 이전하셨다. 둘 째 언니를 시작으로 우리 세 자매 모두 시집가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모두 두 자녀씩 낳아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다시 돌아보면, 우리 가족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풍파가 많았다. 매일같이 크고 작은 위기가 찾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 가족을 지탱해 준 것은, 엄마의 묵묵한 믿음과 기도였다.
나는 매일 아침 엄마의 기도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에 주님 앞에 앉아 우리의 안전과 건강과 복을 구하시고, 언제나 절망 대신 소망을 노래하셨다. 그 기도의 힘이 우리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희망을 꽃피웠다.
우리를 단단하게 자라게 한 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밝고 명랑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주의 은혜라.
나 또한 그 믿음을 지켜가기 위해 오늘도 새벽예배에 나가려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밝고 명랑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주의 은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