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펜으로 배운 것들
볼펜 드로잉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어느덧 석 달이 지났다.
지울 수 없는 그림이라는 것에 매료되었고, 볼펜의 선으로도 마치 사진 같은 섬세하고 정밀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나 자신을 더 깊이 배우게 되었다.
오늘은 그동안의 깨달음을 조용히 정리해 본다.
드로잉을 배우며 가장 먼저 부딪힌 건 힘빼기였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듯 볼펜으로 윤곽선을 잡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럼에도 힘이 몸에 밴 나는 힘 빼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애쓰고 힘쓰며 살았던 그동안의 모든 시간들에 대한 연민과 서러움, 아픔등을 깊이 대면하고, 그렇게 나를 버텨주느라 힘쓴 것들에 감사했다.
이제는 그리 애쓰지 않고, 힘을 빼고 쉬어도 된다고 안아주었다.
힘이 들어가 거칠고 비뚤어진 선들은 내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보듬어야 할 선이었던 것이다.
힘 빼기와 더불어 내게 필요했던 것은 객관적으로 보기였다.
스케치북을 앞에 놓고 선을 잇느라 열중하다 보면 눈앞의 그림만 보이기 마련이다. 그림 그리기에도 거리 두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눈앞의 것만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시야가 좁아져서 부분적인 것에 신경을 쓸 때가 많다. 이럴 때는 잠시 일어나 한걸음 뒤에서 그림을 봐야 한다.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훨씬 그림에 대한 인상이 뚜렷하게 보인다.
눈앞에 두고 그릴 때는 미처 보지 못한 균형과 인상 등을 더욱 객관적으로 순수하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 사이도 그렇다.
나와의 관계에서나 인간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 두기는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있을 때는 보지 못한 것들을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보다 더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 관계에서의 객관화가 될 수 있다.
객관화가 잘 될수록 전체를 더 조화롭게 가꿀 재료들이 생길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빛의 방향은 상당히 중요하다.
빛의 방향에 따라 명암이 생기고, 명암의 묘사는 그림을 한층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보에게 있어서는 빛의 방향을 찾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빛의 방향을 잡았다 해도 그 빛이 어디를 빛나게 하고 어느 부분을 어둡게 하는지는 꽤 예민한 관찰을 해야만 알 수 있다.
빛의 방향을 찾는 것은 나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빛과 그림자를 어떻게 조화롭게 엮어서, 인생을 보다 입체적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가에 대한 깊은 고찰이 될 수 있다.
그릴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필수다.
단지 겉으로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표정이나 배경등에서 환경이나 상황 등을 파악해야 한다.
대상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 대상의 눈빛을 만들고 표정을 만들고 분위기를 만든다.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선은 생명을 얻는다.
그렇게 대상의 내밀함까지 관찰하다 보면 대상과 나와의 일체감이 생기고, 나의 내면을 살피는데도 퍽이나 도움이 된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나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찢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지워지지 않는 볼펜의 선이 답답했다.
그러나 애초에, '지울 수 없는 그림'이라는 면에 매료되어 시작한 것이 아닌가...
망친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면 그 행위는 아마도 성장 없이 계속될 것이다.
포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망친 선위에 다시 선을 그리고 명암을 덧입히며 그리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되고야 만다.
중요한 것은, 좌절도 포기도 아니고 꾸준히 하는 것이다.
꾸준히 하면 그 안에서 새로운 방법들이 생겨난다. 그 방법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그림을 완성하겠다는 의지이며 그림에 대한 애정과 나 자신에 대한 신뢰이다.
꾸준히 그렸을 때, 비로소 날짜를 써넣는 순간의 환희를 맛볼 수 있다.
인생에는 마침표가 없다.
내가 숨 쉬는 한, 나는 계속 배우며 성장할 것이다.
날마다 새로운 세포들이 생겨나고, 날마다 새로운 감정들이 생겨나고, 날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생겨난다.
그러면서 마침내 단 한 장의 작품이 되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서툴러도 괜찮다, 인생도 드로잉도.
멈추지 않고 그려나가는 한,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의 작품이 되어간다.
해피마망의 드로잉 에세이 : '수요일은 선을 긋는다'는 매주 토요일에 발행됩니다.
* 안녕하세요.
해피마망의 드로잉 에세이 '수요일은 선을 긋는다'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에세이는 다음 주 토요일 10화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될 예정이에요.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그린 그림'에 매료되어서 인생에 덧칠을 하는 마음으로 그렸어요.
끝까지 읽어 주시고 이후에 연재물도 함께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