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을 긋는 일은 곧, 나를 쓰는 일이다
아침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은 기어이 폭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러 가는 날이다.
젖지 않도록 가방을 챙기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바닥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오늘은 어떤 선을 만나게 될까 생각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경쾌한 피아노처럼 귓가를 두드렸다.
화실에 도착하니 의외로 사람이 적었다.
폭우 때문일까. 몇몇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나를 보며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비가 많이 오는데도 일찍 오셨네요."
사실 나는 집에서 조금 서둘러 나온 것이다. 선생님께서 "실력은 그리는 시간에 달려 있다"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두 시간만으로는 늘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림은 시간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더 그림 앞에 앉아 있고 싶었다.
오늘의 교본 역시 한 장의 사진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흑인 소녀의 얼굴.
종이를 받아 들고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니 순간 마음이 숙연해졌다.
한줄기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그 얼굴은 말없이도 수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삶의 무게, 설명할 수 없는 슬픔, 그리고 그 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빛 같은 것.
나는 볼펜을 들어 선을 긋기 시작했다.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힘을 뺀 선에서 비로소 진실이 드러난다."
처음엔 손이 굳었지만, 곧 힘을 조금씩 빼자 부드러운 선이 나왔다. 얼굴 윤곽을 따라 선을 그으며,
그림이 단순히 형상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 그리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힘을 주어 그린 선은 오히려 항상 내 마음과 어긋났다. 그러나 힘을 빼고 바라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은 선에는 내 마음이 온전히 담겨 있는 듯했다. 선 하나하나가 나의 흔들림이자 고백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다시금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서 문득 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삶의 무게 앞에서 흘린 눈물, 그러나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고 살려고 애썼던 간절함, 젊은 날의 내 모습이
소녀의 눈동자에 겹쳐져 있었다.
내가 그리는 것은 단순히 소녀의 얼굴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폭우가 내리는 날, 나는 화실에서 내 안의 빗줄기를 그려내고 있었다.
밖의 빗줄기는 여전히 굵게 쏟아졌지만, 내 안의 빗줄기는 조금 잦아든 듯했다.
오늘의 드로잉은 그렇게 끝났지만, 내 안의 깨달음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림은 단순히 재현이 아니라 '사유하는 도구'라는 것.
선을 긋는다는 것은 곧, 나의 내면과 마주하고 그것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이라는 것.
오늘 그린 건 소녀의 얼굴이지만, 내 마음의 초상이기도 하다.
해피마망의 드로잉 에세이 :
수요일은 선을 긋는다는
매주 토요일에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