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체적 인간으로
우리는 어둠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
길을 잃은 순간,
마음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허무한 감정들 말입니다.
영화〈라이프 오브 파이>의 시작은 그런 어둠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파이의 유년기는 비교적 평평하고 안전했습니다.
먹고사는 걱정은 크지 않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익숙했으며, 세상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곳에는 깊은 질문도, 치열한 선택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밝고 안정적이었지만, 그만큼 삶은 평면적이었습니다. 소년의 삶이었지요.
그러나 가족의 이주 결정과 함께, 파이의 삶은 한순간에 어둠으로 떨어집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는 침몰하고, 그는 광활한 바다 위에 홀로 남겨집니다.
눈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물결, 발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함께 하던 모든 것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파이의 삶은 더 이상 평평하지 않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나는 왜 이토록 두려운가.”
이 질문들은 그를 표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바닥으로 데려갑니다.
한 단계 아래로, 또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파이는 마침내 하나의 존재를 마주합니다.
바로 뱅갈호랑이, 리처드 파커입니다.
많은 해석이 말해주듯, 이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그는 파이 안에 잠들어 있던 본능, 생존 의지, 분노, 두려움, 그리고 살겠다는 결단 그 자체입니다.
파이가 이전의 평온한 삶에서는 결코 만날 필요가 없었던, 그러나 반드시 존재해야 했던 내면의 자아입니다.
어둠은 이렇게 우리에게 자아를 데려옵니다.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밝혀주기 위해 찾아옵니다.
밝기만 한 삶에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강인함과 단단함,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힘은
어둠 속에서만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파이는 바다 위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끝내 살아남기 위해 냉혹한 선택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더 이상 이전의 소년이 아닙니다.
어둠은 그를 내면의 자아와 통합된 입체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파이는 기적처럼 육지에 도착합니다.
그는 영웅이 되지도, 위대한 모험가로 남지도 않습니다.
그저 평안한 소시민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정을 이루고, 일상을 꾸리고, 조용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삶은 이전과 다릅니다.
이제 그의 평온은 얕지 않습니다.
어둠을 통과해 본 사람의 평안은 깊이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실을 지나온 사람이 타인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슬픔을 겪어본 사람이 함부로 세상을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파이의 평범한 일상에는 바다의 깊이와 호랑이의 그림자가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어둠은 우리에게 그림자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우리 삶에 입체감을 부여합니다.
그러니,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어두운 시간이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라기보다,
이 어둠이 내게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를 조용히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어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십시오.
그 끝에서 우리는 어쩌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가장 진실한 얼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고난은 결국,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빚어내는
보이지 않는 조각칼입니다.
그러니 어둠이 찾아오면
두려움 대신
이렇게 인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