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 11월, 12월은 특히 바쁜 남편의 일정으로 우리 가족은 연말 분위기를 함께 즐기지 못한다. 크리스마스에, 방학까지 겹치는 아이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집안 분위기에 매번 실망한다. 희망고문이라도 필요하겠다 싶은 마음에 작년 말부터는 다음 해 1월의 여행스케줄을 미리 예약하기로 했다. 쌓고 쌓아 놓은 항공 마일리지로 어디로 가볼까 했던 그 설렘은 실망을 눈 녹듯 사라지게 했고, 으레 듣던 캐럴조차도 까맣게 잊게 했다. 그렇게 정해진 올해 1월 초 가족여행은 휴양도 적당히, 추위는 싫다하여 싱가포르로 결정. 12월 31일까지 바쁜 남편이 하루 정도는 숨을 돌려야 할 것을 배려하여 1월 2일 출발, 8일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확정을 했다.
미리 계획된 여행이라 순조롭게 착착 진행이 될 것 같았지만,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11월 중하순에야 결정하게 된 아이의 야구 동계 전지훈련. 1월 9일부터 한 달 동안 일본 미야자키로 가는 일정이다. 기가 막히게 여행일정을 잘 잡았다는 생각을 하며 동계훈련 일정도 못을 박았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일정들은 하나씩 다가왔고, 내 마음은 한 달 동안 엄마 없이 생활할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여행 세부 일정을 짜는 것은 뒷전이요, 아이 짐만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1년 전부터 확정한 여행은 하루 만에 스케줄을 정리하여 단 몇 시간 만에 짐을 싸서 출발을 했고, 다행히도 네 식구 모두 즐겁고 무탈하게 잘 보내고 왔다.
이제부터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짐을 푸는 순간부터 준비해 두었던 아이 짐을 다시 쌌다. 짐을 싸면서 아이에게 각 파우치에 든 것을 설명도 해주어야 했고, 아이의 컨디션이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쉬게도 해야 했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도 잘라줘야 했고, 손발톱도 다듬어야 했으며, 의심되는 피부질환으로 피부과도 가야 했고, 그와 중에 아이가 친구를 만나는 시간을 내어주기도 해야 했다. 빠듯하게 계획한 일들을 모두 하고 동계훈련 갈 준비를 겨우 마쳤다.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켰다. 출발 당일 새벽,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컨디션은 좋았고 어미인 나는 2시간 남짓 눈을 붙인 채 공항으로 배웅을 나갔다. 비몽사몽 아이를 떠나보내니 짠한 기분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지금, 아이는 잘 지낸다고 매일 안부를 전하고 있다.
가기 전부터 아이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한 달간의 긴 일정에 훈련만으로 빼곡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을지, 입 짧은 아이가 밥은 잘 먹을지, 잠자리를 설치진 않을지 온갖 걱정을 해댔다.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생각보다 너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매사 감정을 싣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주어진 것을 하기만 하면 별 다른 생각을 안 하는 단순한 성격이기도 해서 전지훈련에서는 평소 단점이라고 평가했던 이 성격들이 백분 발휘를 하여 생활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는 듯하다. 반복적인 '식사-훈련-식사-훈련-식사-훈련'의 일정에서 아이는 "힘들어! 그래도 자고 나면 괜찮아." 이 한마디로 후기를 마무리 했다. 별다른 대꾸도, 설명도, 불평도 없었다. 중간중간 휴식시간 핸드폰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싶기도 하지만, 잠깐의 스마트폰 사용이 아이의 힘듦을 삭일 수 있으면 충분히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물론 엄마 마음은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었으면 하지만.. ^^
이번 전지훈련은 6일 훈련 후 1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제 처음으로 맞는 휴식일, 코치님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시내 탐방을 하며 쇼핑도 하고 외식을 하고 온 모양이다. 아마 아이들에겐 가장 중요하고, 기다렸을 시간. 아이들 모두 각각 원하는 글러브를 사서 귀가했는데, 입이 귀에 걸린 듯하다. 훈련으로 왔던 근육통은 언제 그랬는지 싹 없어졌고 그저 새 글러브에 신이 나 싱글벙글했다는 후문이다. 열심히 운동했으니 과하지 않는 선에서의 보상은 아이들이 고된 훈련도 참고 해낼 수 있는 에너지를 더 만들어 줄 것이다.
가장 우려했던 밥 먹기. 생각보다 순조롭게 먹고 있는 듯하다. 배려 깊은 코치님 덕분인데, 잘 먹고 몸 좋은 고3 형이 아이의 식사 전담 마크가 되어 매 식사를 챙겨주게끔 하셨다고. 형이 주는 양은 먹어야 하는 것 같고, 속도도 맞춰야 하는 분위기인 듯. 물론 여전히 꼴찌로 식사를 끝내지만 그래도 잘 먹고 있으며 빨라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최근 2~3일 통화에서도 별다른 얘기 없이 훈련이 힘들다는 얘기만 한다. 안쓰럽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기에 원하는 야구를 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으로 여기고 있다. 그 힘든 과정을 참아내고 그래도 야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하면 돌아와서는 물심양면 아이의 야구 진로를 응원할 생각이다. 매번 공부를 놓지 못하는 나의 마음때문에 아이를 종종 힘들게 했다. 야구에 진심인지도 모르겠던 태도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듯하다. 이번 한 달 동안의 힘든 전지훈련을 잘 버텨낸다면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아이가 마음 편히 운동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은 아이의 만 12세가 되는 날. 처음으로 생일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는 그곳에서 힘들지만 형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고, 나는 그 덕분에 여유라는 선물을 받았다. 집이 절간처럼 조용하긴 하지만 끝이 있는 시간이기에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