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16일 목요일 오후 4시 45분. 둘째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1995년 11월 15일. 산부인과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의사는 아직 아기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운동을 좀 열심히 하라.’고 했다.
다음 주는 ‘Thanks Giving Break’이었고 다다음주가 남편의 시험 기간이었다.
16일에 태어나면 여유롭게 아기를 맞이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니 16일에 태어나주면 그야말로 ‘효녀’다.
둘째의 의사는 초음파 하자마자 ‘딸’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살짝 접촉 사고가 있었다.
딸만 둘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정신 줄을 놓아야 할 정도의 충격인지 아직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둘째의 태몽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딸이었다.
방문을 여니 방 안 가득 흰 백합이 나를 맞았다. 절대 아들일 수 없는 태몽이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출산 때까지 꾹 참고 태몽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고 차량 앞 유리에 전화번호를 남겨 놓고 집으로 왔다.
그날 저녁에 차주한테 전화가 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웃으며 “임산부는 괜찮으냐?”라고 물었다.
“그 딸은 너에게 분명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니, 사고는 신경 쓰지 말고 순산하길 빈다.”라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분이 우리에게 베푼 선행이었다.
병원 다녀와서 나는 열심히 움직였다. 남편은 시험 기간이어서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4시쯤에 들어왔다.
간단하게 뭘 좀 차려주려고 침대에서 일어서는데 양수가 터졌다.
우리는 첫째를 깨워 함께 병원으로 갔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에 도착하니 거의 6시가 다 되었다.
남편이 ‘집에 좀 다녀오면 안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처음부터 5분 간격으로 참을 수 없는 진통을 겪고 있는 나에게 여전히 눈치 없는 남편은 첫째까지 맡겨 놓고 집으로 갔다. 8시쯤 의사가 와서 늦어도 11시쯤에는 ‘All Done!’이란다. 11시까지는 견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둘째의 의사는 자연분만을 권장하는 분이었다. 첫째를 제왕절개 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자연분만하자고 했다. 아기집의 절개 방향이 가로면 자연 분만할 수 있다고 했다. 첫째의 의사에게서 ‘복부 표면은 세로로 절개했지만, 아기집은 가로 절개를 했다’라는 확인서를 받았다. 그래서 둘째는 자연분만하기로 했다.
9시쯤 남편이 돌아왔다.
둘째 공주님 맞이하느라 샤워도 하고, 면도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왔다.
첫째의 드레스까지 챙겨 왔다. 하늘이 노래 잔소리할 기력도 없었다. 나는 연신 시계만 보았다.
‘11시까지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11시에 의사가 와서 ‘12시’라고 했다.
1시간쯤은 더 견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의사는 또 30분 후를 얘기했다.
첫째를 부탁하러 남편은 12시쯤 지인의 집으로 향해 다시 병원을 나섰다.
앞으로 다가올 고통은 내가 익히 경험하여 알고 있다.
의사가 올 때마다 나는 “죽을 것 같으니 제발 제왕절개 좀 해 달라.”라고 매달렸다.
의사는 “남들 다 하니 너도 할 수 있다.”라고 했다. 아니 그 말은 첫째 낳을 때 내가 겁 없이 내뱉은 말인데... 그리고 30분만 더 참으라고 했다. 2시쯤부터 간호사가 남편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탯줄을 자르기 위해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3시 넘어서 남편이 돌아왔다.
의사든 간호사든 누구든 눈에 띄면 나는 매달렸다.
‘제발 좀 살려주세요. 무통 주사라도 좀 놓아주세요.’
무통 주사를 너무 일찍 맞으면 나중에 힘을 줄 수 없다며 의사는 안 된다고 했다.
첫째 출산 때는 무통 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산통이 너무 심해 침대의 낙상 방지 가드를 미친 듯이 흔들며 이를 악물었다.
간호사는 나에게 그러면 이가 상하니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라고 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간호사가 내 입에 가제 수건을 물려주었다. 가제 수건을 물고 있으니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금식하고 있어서 물도 주지 않았다. 대신에 간호사가 얼음 조각을 가져와 입에 넣어주었다. “씹어 먹지 말고 천천히 녹여 먹어라.”라고 했다. 얼음을 녹여 먹으며 라마즈 호흡을 했다. 4시쯤 무통 주사를 맞았다. 여전히 아팠다.
오후 4시 45분 너무나 예쁜 우리 둘째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둘째는 정말 여성스러운 얼굴로 아빠에게 합격점을 받아 사진과 동영상을 아주 많이 남겼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의사는 ‘1시간만 더’, ‘30분만 더’하면서 나를 다독여 자연 분만을 성공시켰다. 둘째 출산 후에는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왜 시커먼 국 안 먹느냐고 궁금해했다.
병원에 국을 갖고 와서 데워 먹기도 귀찮았다. 사실 미국 병원 식사는 메뉴도 다양하고 아주 맛있다.
그리고 첫째 때는 도와주는 사람 없이 남편이랑 둘이 산후조리를 했지만 둘째 때는 도우미분을 구했다.
국제결혼을 하여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분이었다.
누군가 도와줄 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이미 출산과 육아 경험이 있으니, 둘째는 미국식으로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마음먹어서 미역국을 준비하지 않았다.
미역국을 먹지 않았어도 초유 수유에 성공하고 6개월까지 모유 수유도 했었다.
돌 때까지 먹이고 싶었지만 첫째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6개월 만에 단유 했다.
17일에 퇴원을 하고 싶다고 하니 의사가 ‘What a brave woman!!’ 이라고 했다.
첫째 낳을 때 의사한테 들은 소리를 둘째의 의사한테도 들었다.
하지만 약간의 빈혈 증세가 있어서 하루 정도 더 상태를 지켜보아야 한다며 거절했다.
이때도 나는 병원비 걱정을 했었다.
bravery는 needy에서 나온다는 걸 그들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