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버님이 화내시는 걸 보지 못했다. 언성을 높이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이유 없는 시어머니의 심술에 설움이 목젖 끝까지 올라오다가도 내 등을 토닥이시는 아버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는 순간 그 설움은 잦아들었다.
시댁 아파트 주차장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이사 오고 보니 대학 때 신세를 진 은사님이 같은 아파트에 계셔서 인사드리러 간다고 했다.
"지도교수님이시구나."
"아니, 지도교수님도 아닌데 취직도 신경 써 주시고 아무튼 4년 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어.
너무 훌륭한 분이셔."
무거운 과일바구니와 꽃바구니를 둘이 낑낑거리며 들고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갔다. 친구가 시댁과 같은 층수를 누른다. 그때 서야 친구의 전공이 기억났다. 둘이 한참 웃었다. 올해에는 어느 제자분이 '제자들과 아버님이 함께 찍은 옛날 사진'들로 탁상용 달력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배포했다고 한다. 젊은 아버님과 앳된 제자들이 사진 속에 있다. 5월이 되면 아버님의 따뜻함을 못 잊어 많은 제자가 아직도 찾아온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아버님은 따뜻한 분이다.
남편의 사망 소식에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한마디 하고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를 마치고 시댁으로 갔다. 한 번도 울지 않던 막내가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운다. 막내에게,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딱 한 마디 '이제 앞만 보고 살아야 한다.'라고 하며 눈물을 보였다. 더 이상 말씀이 없었다. 앞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이가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나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남편이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 같은 존재라면, 시아버지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우리에게 세상 풍파를 막아주는 울타리 같은 존재다. 그런 아버님이 요즘 기력이 너무 없다.
미국에서 첫 아이를 유산했을 때 시어머니는 나의 안부보다는 '**이 부엌에 들여보내지 마라.'는 말로 내게 상처를 주었다. 반면에 시아버지는 '사랑스러운 나의 새 아가에게'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손 편지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객지에서 홀로 아픔을 이겨내느라 고생이 많음을 내가 안다. 사랑한다.'로 끝맺음했다.
우리가 연인이 되기 전이었다. 하루는 남편이 친구에게 오토바이를 빌려 와 뒷좌석에 나를 한 번 태워보려고 작업을 걸었다. 싫다는데 자꾸 그러니까 홧김에 발로 오토바이를 찼는데 오토바이랑 남편이 계단 아래로 같이 굴렀다. 다행히 남편은 멀쩡했고 오토바이는 부서져서 수리비를 물어주었던 걸로 알고 있다. 이 장면을 지나가던 아버님이 목격했다. 이때도 아버님은 남편을 혼내고 나에게는 아무 말씀 없었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귀한 아들을 막 대한 나를 천하의 성질머리 고약한 아이로 표현하며 머리를 저었다고 한다.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버님은 남편의 선택을 존중했고, 어머님은 반대가 심했다.
막내가 두 돌 되던 여름에 나는 자궁에 아주 작은 종양이 생겨 조직 검사를 하게 되었다. 암은 아니라는 결과를 받았다. 그때도 시어머니는 '젊은것이 허구한 날 아프다.'는 말로 나를 울렸다. 다음날 시아버지는 지금부터 제사 음식은 주문하라는 말씀과 함께 보약을 보냈다. 여름에 제사와 시부모님 생신이 몰려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준비해야 한다. 손이 워낙 귀한 집안이라 친척이 아예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에게 너무나 순종적인 아내다. 시어머니가 남편의 말을 거역하는 아내는 아니라서 그나마 또 다행이었다.
아버님과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열흘에 한 번 정도로 점심을 같이 먹었었다. '아가, 밥 먹었니? 안 먹었으면 내려오너라.' 약속 없이 급하게 부르실 때는 항상 우리 집 근처 음식점이다. 내가 다행히 집에 있고, 점심 전이면 그날 함께 한다. 식사 후 아버님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신다고 한다. 나는 운동을 핑계 삼아 걸어간다고 한다. 먼저 보낸 아들을 떠올리시며 언덕길을 혼자 내려가실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 쓸쓸한 뒷모습을 뵙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집 앞에는 오시게 하고 싶지 않다. 만약 점심을 이미 먹었거나 외출하여 거리가 멀어 갈 수 없을 때는 다음 날로 미룬다. 미리 약속하고 만나는 날은 내가 아버님 댁으로 올라가 모시고교외로 나간다. 좀 멀리 드라이브하면 좋아하신다. 내가 아버님께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이다.
요즘은 일주일에 네다섯 번 점심을 밖에서 같이 먹는다. 주로 아버님이 메뉴를 정하신다. 지나고 보니 평소에 내가 밥을 남기지 않는 곳 위주로 가시자고 하신다. 나는 신혼 때 먹성이 좋지 못해 늘 깨작거린다고 시어머니께 혼이 많이 났었다. 더구나 식은 밥은 항상 내 차지여서 더 입맛이 없었다. 하루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내 밥그릇을 가져가시더니 당신 밥그릇에 한 숟가락, 시어머니 그릇에 한 숟가락, 시누이도 한 숟가락 덜어주시더니 '아가, 너도 이제부터는 새로 지은 밥을 먹어라. 앞으로 식은 밥은 넷이 (당시 남편은 미국에 있었다) 공평하게 나눠 먹는다.'라고 하셨다.
많은 사람이 '시아버지랑 만나면 어색하지 않으냐?'라고 묻는다. 긴 침묵이 당연히 어색하다. 아버님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어색함을 뛰어넘는 편안함이 함께 있다.
아침을 먹고 커피 한잔을 내려 안마 의자에 앉으면, 멀리 금정산 아래 아버님이 계신 아파트가 보인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매일 아침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