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끝나는 나이
언젠가부터 큰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말 한마디가 또 폭풍이 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애쓰는 불안이다.
오늘 작은 아이가 개학을 하고
큰 아이와 나 둘만 집에 남았다.
아침부터 잔소리거리는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간 몇 번의 폭풍 같은 시간을 겪으며
나도 나름 도를 닦았는지
이번에도 이 정도는 잘 참아냈다.
물론 오늘 아침도
뒹굴거리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반려견 산책을 시키러 가기 전부터 돌아와서까지
밥솥에 뜸이 들 듯 한참을 꾸물거리다
겨우 외출 준비를 한다.
그 사이 나는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
점심을 함께 먹고
가방을 챙겨 얼마 전 오픈한 내 교습소로
큰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다.
이사와 집안 환경의 변화로 1년쯤 쉬었다가
다시 집 근처에서 일을 시작한 참이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도착한 교습소.
아이는 책상 위에 있던 귤을 까먹고
내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과 패드를 만지작거린다.
기기를 잘 다루는 아이는
새로운 사용법을 이것저것 알려주며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자습실 겸 상담실로 쓰는 작은 교실에 가서
학원 숙제나 개인 공부를 하라고 했다.
별다른 거부 없이 교실로 가면서도
춤을 추고, 복도 유리창 너머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친다.
가방 부스럭거리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평범한 오후.
히터 바람 소리와
바로 옆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린다.
그 소리마저도
그저 평범하다.
몇 통의 전화를 받고
교습소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다
문득 옆 교실에 있는
‘큰 아이’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슬리퍼를 끌고 몇 걸음 걸어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화들짝 놀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예상했을 광경.
문을 열지 말 걸,
뒤늦게 그런 생각이 스친다.
책상 위에 쌓여 있던 학원 책들 중
맨 위의 책을 급하게 뒤집는 손.
아이의 시선은 창가로 흔들리고
창턱에는 충전 중인 휴대폰이 놓여 있다.
나는 또 화가 나고 만다.
“너 연필도 없이 공부해?”
“암기하는 거라 필요 없어.”
“그래? 외운 게 뭔데?”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확인하려 든다.
이 대화가 어디로 갈지 알면서도.
“아직 외우는 중이야.”
“뭘 외우는데?”
“외워도 되고, 안 외워도 되는 거야.”
아이는 책을 가방에 급히 넣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고 말한다.
휴대폰이 없는 아이는 와이파이를 잡아 쓰는 공기계,
그마저 내가 갖고 있겠다고 하자
어떤 말에도 잠잠하더니
역시 발끈한다.
그럼 엄마 폰도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한다.
그래서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지?
— 응, 없어.
그래.
네가 좋아하는 휴대폰 들고 지금 그냥 학원 가.
히터를 꺼버리고
자리에 돌아와 털썩 앉는다.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 소리들에
머리만 아프다.
눈물이 핑......
잠시 조용히 앉아 있던 아이는
이내 문 밖으로 사라진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번 이렇게
대화를 끝낸다.
이건 싸운 게 아니라
또 한 번
대화를 놓쳐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 나이에 필요한 건
더 나은 말이 아니라
말을 멈출 줄 아는 용기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