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ello(3)

3. 이모집을 가다

by 아루

“이모 집에 갈래? 이모 집에 귀여운 강아지랑 고양이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자녀들이 이미 성인이 된 이모는 가끔 친정에 내려오실 때마다 나에게 물었다. 애정이 담긴 이모의 농담에 일곱 살의 나는 어느새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나의 눈빛을 읽은 이모는 다시 물으셨다.


“어때? 진짜 갈래?”


이모와 엄마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던 나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네... 에......”


이모 집으로 가기 위한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엄마와 이모는 평소보다 잦은 통화를 하시는 듯했다.


“언니 괜찮겠어?”...... “그래, 며칠 데리고 있다가 내가 데리러 가든가 할게.”


엄마는 큰 가방 몇 개에 내 물건들을 여러 날에 걸쳐 챙겨놓으셨다. 이따금 한숨을 쉬기도 하며, 딸아이와의 첫 이별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잘 가지 않는 아동복 가게에 가서 여성스러운 옷들을 여러 벌 사주셨다. 평소에는 주로 흙장난하기 좋은 바지만 입고 다녔던 나인데...... 옷을 고르시면서도 내 맘에 드는지 재차 물으셨다. 이따금 엄마가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이나 얼굴에 그늘진 알 수 없는 표정들을 어린 나도 종종 유심히 바라보며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얼마쯤 지나 이모와 이모부가 다시 오셨고,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엄마에게 한참 손을 흔들었다. 그저 즐거웠다. 오빠만 좋아하는 할머니의 무서운 고함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다. 엄마가 없을 때 늘 엄마 욕을 하는 할머니...... 이제 귀를 막지 않아도 됐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모 집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다. 이모 집에 있다는 강아지들도 궁금했다. 이렇게 혼자만의 들뜸에 빠져 있을 때 저 멀리 엄마가 다시 보였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이미 울고 있던 엄마. 다 보이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나는 이제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엄마와의 첫 헤어짐이었다.


이모는 엄마보다 잘해주시려 애쓰셨다. 먹거리는 늘 풍족했고, 학교에서 하는 행사나 소풍까지 빠짐없이 참석해 주셨다. 주말부부인 이모부는 금요일 저녁이면 항상 양손 가득 가족들이 먹을 것들과 내가 좋아할 만한 과자들을 사다 주셨다. 이모부와는 큰 추억이 없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불편하지 않게 지내게 해 주셔서 시간이 흐를수록 고마운 마음이 든다. 큰 언니는 이미 결혼한 새댁으로 근처에 살아 자주 볼 수 있었고, 작은 언니는 아직 미혼이어서 이모와 같이 살고 있었다. 나는 언니와 방을 같이 썼다.


방 한쪽 구석에는 언니의 첼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분한 하늘색 가죽의 첼로케이스는 볼 때마다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깜깜한 밤에는 사람이 서있는 듯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단 둘만 있을 때는 갑자기 살아서 움직일 것 같기도 했다. 언니가 연주 때문에 첼로를 들고나가는 날 말고는 하늘색 케이스에 쌓인 언니의 첼로는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내 눈에 자꾸 들어오는 존재가 되었다. 한 번씩 집에서 연주하는 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활을 좌우로 그었을 뿐인데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지?’ 마술 같았다.


나의 시선을 느낀 언니가


“너도 한 번 해볼래?”


하며 손에 활을 쥐어 자세를 잡아주었다. 낯선 활이 손에 닿자 처음엔 거부하듯 쭈뼛거렸지만, 이내 엉성하게 활을 쥐었다. 활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았을 텐데 어린 나에게는 벅찼다. 낯선 사람과 단둘이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말 없어진 어린아이의 벅찬 8여 년의 삶도 함께 그려지는 것 같았다.


* [나에게 첼로를 가르쳐 준 이종 사촌 언니의 시선으로...]


열 살 조금 넘게 차이나는 막내 이모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이모와 자주 연락하고 지냈고,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만남의 횟수가 띄엄띄엄해졌긴 하지만 이모의 딸은 꽤 밝고 명랑했다. 궁금한 게 많아 질문도 많고, 티브이 광고에 나오는 춤이나 노래도 곧잘 따라 했다. 그러나 차츰 성장에 반비례하여 말수가 줄었다. 그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고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도 늘 조용조용, 그래도 잘 지냈다. 이따금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면 혼자 울곤 한다는 사실 말고는 떼를 쓰거나 의기소침해 있거나 하는 모습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첼로 케이스 지퍼 한쪽이 열려 있었다. 활도 반대로 넣어져 있었다. 이상해서 아이에게 물었더니, 놀란 토끼눈으로 자기가 꺼내보았다고 했다. 혹시나 악기가 망가질까 봐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그리고 주눅 든 아이의 모습에 이내 미안해졌다.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는데, 마침 악기공방에 들를 일이 있어 갔다가 어린이용 첼로를 하나 샀다. 집에 와서 선물이라고 주었더니 전에 없이 활짝 웃는다. 진작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너무 무심했네!


활 잡는 법부터 하나씩 가르쳐 본다. 처음이니 당연히 서툴다. 자기 자식은 가르치기 어렵다고 했던가. 물론 자식은 아니지만 일반 학생들하고 또 다른 느낌이다. 그래서 조금 더 엄하게 조금 더 빡빡하게 가르치는 날도 있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건 보이는 데 하기 싫다고는 말 못 한다. 기초를 탄탄히 하기 위한 것이다. 취미라도 잘해야 즐거운 법이니깐...... 나중에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을 음악으로 풀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로부터 23년 후 나의 결혼식 날. 식장에서 마주한 엄마 생각이 났다. 정신없이 많은 인파 속에서도 엄마와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났다. 그래서 일부러 엄마를 쳐다보지 않았다. 3개월 만난 남자랑 결혼한다고 할 때 아빠는 남편을 보더니 바로 승낙하셨지만, 엄마는 보기도 전에 이미 반대하셨다. 대놓고 반대는 아니었지만, 표정이 이미 내 딸을 아직은 보내기 싫은 엄마였다. 서른이 다된 딸에게 선자리가 들어와도 “우리 애는 아직 어리다” 라며 거절하던 엄마였다. 결국은 엄마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게 딸의 인생이고 사람의 인생이지만, 엄마와 자식, 엄마와 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함이 있었다.


막내 딸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란 엄마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했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

당시는 지금보다 더 가부장적인 사회,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결혼 생활,

시집살이의 고단함......

그렇다.

고단함.......


내 딸도 이제 당신과 같은 그 고단한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저 축하만 해줄 수 없으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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