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옥미 Jul 25. 2021

어른 아이

누가 봐도 어린아이들 무리에 있지만 엄연히 난 이모였고 고모였다.



"우리 막내는 속도 안 썩이고 참 착해"

 얌전하고 속 깊고 까탈스럽고 고집 센 막내딸. 어릴 적 날 대하는 어른들의 표현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나는 소심하고 잘 삐지고 용기도 없고 샘도 많았던 아이다. 빨간 불에는 절대로 길을 건너지 않았고, 작은 돈을 길에서 주었을 때 파출소로 달려가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절대 정의라고 여겼던, 자기 신념이 강한 아이였다. 심부름을 시키면 양말을 신지 않고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고, 학교에 돈을 낼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한 안에 내야 했다. 안 그러면 뿌루퉁해서 입이 댓 발은 나와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나의 기분이나 상태에 대해 표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샘이 나고 심술 나는 것을 티를 내지 않았다고 자부했었다.


어른이 돼서 지금 어린아이들을 보니 다 알겠더라. 어떤 마음인지를, 아이들의 표정과 말만 들어도 TV 드라마에 나오는 연기자들처럼 속이 환히 보이지 않던가. 난 나름 표현 안 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했다고 여겼었는데 엄마나 언니들이 다 알고 있었겠구나. 생각만 해도 부끄럽기도 하고, 짠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7남매를 낳고 먹고살기 힘들어 일만 했던 엄마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아이 하나 낳고 몸조리 잘하면 건강해진다는 말 처음 임신을 계획하여 낳은 막내가 바로 나다. 일명 몸조리용으로 낳은 막내딸. 태어나면서 이미 나보다 일 년은 먼저 태어난 조카와 나와 동갑 조카가 있었고 몇 살 터울의 조카들도 줄줄이 있었다. 어린 시절 조카들과 함께 커왔기에 진짜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어른 흉내를 냈다. 흉내 낸다고 어른이 되겠는가?  소심하고 샘이 나서 잘 삐졌던 내면의 모습은 여기저기서 구멍 뚫린 분화구에서 물이 새 나오 듯 삐져나왔다. 아무래도 언니, 오빠는 젊었고 조카들은 젊은 부모 밑에서 자라다 보니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면서 내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빨리 파악하게 된 것 같다. 스스로 비교하고 비교를 당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나이 비슷한 조카들과의 피할 수 없는 비교는 어린 나이에 이모로, 고모라는 프레임에 갇혀 살 수밖에 없는 어른 아이가 되었다.


둘째 언니의 딸은 나이가 나와 같았고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조카에게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말에 뼈를 심어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서 절대 이모라고 부르지 마!”

아이들이 알게 되면 놀림감이 되거나 학교에서도 이모, 고모의 위치에 서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나도 아이였음에도 아이일 수 없는 위치에서 자랐다. 나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 이모, 고모로 불리니 어른인 척하고 살았었구나를 느낀다. 동갑내기 조카는 나와 공부하는 실력은 비슷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린 길이 갈라졌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난 당연히 대학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역에서 그래도 공부 잘해야 들어가는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지원했다. 내 조카는 여고에 진학해서 대학에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우리의 길은 갈라져 버렸다.


중학교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는 환갑이 얼마 남지 않은 연세였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과 연세 많은 부모님을 보면서 진로나 앞으로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조차 나에겐 사치로 여겨졌다. 대학은 빠른 물길 때문에 건널 수 없는 징검다리 같았고 비전이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답답한 돌덩이에 막혀 버린 길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의 강요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 사람도 없었지만 스스로 최선의 착한 길이라고 믿었다.


난 착한 아이였다. 아니 착한 아이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그저 말 수 적고 얌전한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도 내가 이모, 고모라는 무게로 어른인 척해가며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은 아이 었다. 그게 나의 자존심이었고, 명예였다. 부모님도, 주위에 어른들은 말썽 안 피우고, 말대답 안 하고 자리할 일 알아서 하는 날 믿어줬고 인정해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기적이긴 해도 날 위한 결정과 가고 싶은 길을 더 고민하고 방향을 찾아더라면 내 인생의 여정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바로 위에 다섯째 언니도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언니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보다 훨씬 씩씩했고 당차 보였지만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가지 못했다. 우리의 현실이 그랬다. 그만큼 가난은 우리 꿈을 펼치기에는 큰 장애물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공부 잘하는 학교에 지원한 것으로도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래 그러면 됐지. 부모님이 좋아하시고 졸업해서 취업을 하게 되면 든든해하시겠지, 그럼 된 거야!" 아무리 이렇게 스스로 위로를 하지만 난 괜찮지 않았다.


스스로 결정을 했음에도 상업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난 학교에 잘 적응을 못했다. 평준화 학교가 아니라 성적으로 간 학교여서 공부 잘하는 친구들 틈에서 내 성적은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등수를 기록했다. 주산과 부기, 컴퓨터 시범학교여서 베이식, 코볼, 어셈블리 등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다. 이름만 들어도 재미없게 생기지 않았는가? 진짜 재미없었다. 자격증을 따야 하고 취업을 위해 다방면으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은행이나, 경리로 취업을 해야 하는데 "문양" "미스 문"이라 불리며 숫자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싫었다. 아무리 효녀로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열망이 강해도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


결국 난 취업을 포기했다.





작가의 이전글 배려를 가장한 배제의 시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