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좀 사야겠는데..." 과천마라톤 이후로 뛰기에 좋은 선선한 가을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는 반바지, 반팔을 입고서 운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날씨가 되어버렸고, 긴팔, 긴바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날씨에 입을 운동복이라고는 기모 없는 얇은 긴바지와 통풍 잘 되는 긴팔 라운드 티셔츠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작년 10월에 추운 가을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준비한 옷인데, 이 복장으로 달리는 것은 이제는 어려울 것 같았다.
뭐가 필요한지 일단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역시나 인터넷에서는 이름 모를 러닝 선배님들이 상세한 정보를 앞다투어 알려주고 있었다. 기모로 된 도톰한 바지, 기모티셔츠, 비바람을 막아 줄 수 있는 튼튼한 바람막이, 지금보다도 더 추운 날씨를 대비한 얇은 러닝조끼 등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리서치를 마쳤다. 다음으로 어느 브랜드를 가볼까 생각을 했다. 운동복하면 나이키이지 하는 생각에 들어가본 나이키 웹사이트에서, 이대로 한 벌 장만하려면 거의 60-70만원은 한다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열려있던 웹페이지를 닫아버렸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성비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이런 멋진 옷들은 내가 상급자에 도달하면 사는 것으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 가지 뿐. 가자 데카트론으로.
데카트론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가족들과 가게 된 인천 송도에서 시간이 남아 할 거리를 찾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데카트론. 어떤 것들을 팔고 있나 살펴보니, 각종 운동 용품이 가득차 있던, 난생 처음 보는 복합 운동용품 매장이었다. 갖가지 운동기구, 운동용품, 운동복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자전거 헬멧을 좋은 가격에 구입을 했었다. 그러고서도 이것저것 살펴보니 가격이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우리집에서 송도는 다소 떨어진 곳이라 다음에 시간되면 가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그 사이 잠실에도 매장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송도보다는 잠실이 가까우니 아내와 함께 잠실 매장을 향해 집을 나섰다.
쇼핑몰 한 층을 차지하고 있는 데카트론은 역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다양한 달리기 의류가 기다리고 있었고, 심지어 맞는 사이즈도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500미리 물 한 병을 쏟아 부어도 모두 튕겨낼 것 같은 뛰어난 방수성능을 보여주는 바람막이는 데카트론 치고는 다소 비싼 10만원을 넘는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유명 브랜드의 절반 이하의 가격이었고, 심지어 기모 티셔츠는 2만원이라는 놀라운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쇼핑 바구니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바지를 고를 차례였다. 바지를 두고서는 약간의 고민이 있었는데, 기모 레깅스를 살까말까 마음이 왔다갔다했다. 0도까지의 실외온도에도 문제없이 달릴 수 있다는 설명이 있어서 겨울에 안성맟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딱 달라 붙는 레깅스를 입으면 다소 민망하겠다는 생각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쯧쯧, 운동복인데 남들 신경써서 무엇하겠느냐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돌려 사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 뒤에 달리기를 여러 번 하면서 실감했는데, 품이 있는 긴 바지는 달릴 때 펄럭거려서 오히려 러닝에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고, 다리에 쫙 달라붙는 레깅스가 훨씬 편하고 공기 저항에도 더 나은 것 같았다. 이렇게 러닝 레깅스는 겨울철 내 필수 아이템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작년 가을철을 떠올려보니 뛸 때 손이 무척 시려웠다는 생각이 나서 장갑도 하나 사게 되었다. 기온이 15도, 10도 여도 옷을 껴입으면 몸은 춥지 않은데, 의의로 별로 춥지 않은 기온에도 손은 시렵다는 것을 달리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골라본 장갑은 손가락이 모두 있고 얇은 기모가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형태인데, 더 추울 때는 손가락 전체를 덮을 수 있는 커버가 추가로 있어서 아주 유용해 보였다. 그 뒤로 이 장갑을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고, 요즘에는 데카트론 겨울 필수 아이템으로 러너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다고 하니, 내 촉이 좋았다는 생각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뿌듯한 생각이 든다. 귀가 시려웠던 것도 생각나 모자도 하나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에서 열이 많이 배출되기에 귀, 머리에 대한 보온 대책이 없으면 겨울철 달리기에 큰 일이 난다는 것도 그 뒤에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이다. 한겨울에 굵은 털로 만든 털모자를 쓰고 뛰는 분들도 봤는데, 일단은 털모자보다는 좀 더 얇은 기모 모자를 써보고, 그래도 추우면 털모자를 써보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쇼핑 바구니가 차곡차곡 차기 시작했지만 필요한 것은 오늘 모두 장만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빠뜨린 것이 없는지 매장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그 덕분에 아주 얇은 패딩 느낌의 러닝조끼도 하나 추가할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 두꺼운 외투를 입는 것보다는 팔이 없는 러닝조끼를 입으면 팔치기에 좋다는 누군간의 설명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살 것이 보이지 않으니 이 정도면 대충 된 것 같았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만큼 투자를 했으니 이번 겨울에 달리지 않으면 돈만 낭비한 셈이 된다. 어떻게든 올 겨울 열심히 달려 보자라는 생각으로 한 다발의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5km 대회를 마치니 5km는 무리 없이 달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복장도 갖추게 되자, 다음 목표를 무엇으로 할지 생각을 해보았다. 5km를 좀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것, 아니면 달릴 수 있는 거리를 늘이는 것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앞에 놓여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유해진 배우 때문이다. 마침 TV에서 텐트밖은 유럽이라는 프로가 방영 중이었는데, 주인공인 유해진 배우가 유럽 여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7, 8km를 달리는 것을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여행 중 낯선 곳에서 운동을 하며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색다른 경험일 것 같았고, 나도 언젠가는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짧은 거리도 아닌 7km나 되는 거리를 달리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피곤한 것이 아니라 상쾌하다고 하니, 선뜻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기분을 나도 직접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운동을 마치고 잘 익은 사과 하나를 깨물어 먹는 모습을 보고는 운동 후 사과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그래, 이 정도를 하려면 10km 정도는 너끈하게 달릴 수 있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를 늘이는 방향으로 연습하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었다.
방향은 정해졌고, 그 다음은 거리를 얼마만큼씩 늘이는지를 결정해야 했었다. 또다시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한 달 만에 10km 뛰는 비결’, ‘조금씩 뛰다보니 어느덧 10km 완주’와 같이 달리기 선배들의 저마다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5km를 뛰고 나서 10km를 뛰는 것까지는 순식간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체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에게는 무리라고 판단을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조금씩 거리를 늘이기로 했고, 한 달에 1km씩 더 뛰면 내년 봄에는 10km를 뛸 수 있겠다는 간단한 계산을 했다.
그렇게 모든 계산을 마치고 며칠 뒤 다소 비장한 각오로 출발점에 섰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지만, 이미 택을 떼버려 반품 불가능한 데카트론 옷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보았다. 뛰어 보니 비록 호흡이 왔다갔다 하기는 했지만, 이전에 경험이 있었던 5km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6km를 넘어서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드디어 들어오게 되었다. 달에 첫발을 내디디는 닐 암스트롱의 심정으로 뜀박질을 했다. 힘들었다. 1km라는 작은 숫자가 추가된 것 뿐이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1이 아니라 10은 더 얹어진 것 같았다. 좀 더 달리자 7km를 뛰었다는 소리가 핸드폰에서 들렸고, 소리를 듣자 말자, 운동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가빠진 호흡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얼굴에서는 왠지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7km의 벽을 뚫은 것이다.
그 뒤로도 달리기는 계속되었다. 놀라웠던 것은 내 몸이 그 후 한 달 간 7km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는 것이다. 급격히 안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보름 정도 지나자 7km를 뛰어도 호흡이 처음처럼 가빠오지는 않았고, 이 정도면 거리를 더 늘여서 8km를 뛰어도 괜찮지 않냐는 마음 한 켠의 소리가 스멀스멀 기어나올 정도였다. 8km를 너끈히 뛸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많으니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같이 한 달 동안은 7km에 좀 더 익숙해지기로 했다.
대신에 새로운 운동코스를 하나 추가를 했다. 집근처에는 서울대공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곳 호수 주위에는 코끼리 열차가 다니는 차도가 있고, 차도 주위로는 넓은 산책로가 있다. 탁 트인 경치를 보며 걷기에 좋은 곳이어서 날이 좋을 때면 나도 가족들과 산책로를 따라 종종 산책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 보니 여기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분들은 예전부터 있었겠지만 관심이 없던 시절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달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제서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에도 통용되는 것 같았다. 호수 주위의 산책로는 약한 경사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곳이라, 양재천 평지와는 다른 형태의 달리기 연습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1주일에 한 번은 서울대공원 산책로를 뛰는 것이 달리기 생활에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