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여행와서 달리기를 해보다니...

by 이태태

1월의 추운 날씨는 길게 이어져만 갔다. 매달 1km씩 더 달리겠다는 호기로운 다짐을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인듯 느껴졌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저녁 늦은 시간의 기온은 계속해서 내려가기만 했고, 뛰는 사람은 커녕 걸어다니는 사람을 보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바깥에서 뛰겠다는 약속은 여지없이 무너져서 평일에는 약속했던 달리기를 하지 않는 날이 늘어만 갔다. 비상상황이다. 평일에 달리는 것은 포기하고, 그나마 주말에, 그것도 따뜻한 한낮을 이용해서 한 달에 몇 번 정도라도 뛰는 것으로 대타협을 했다.


운동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하는 상황이 지속되던 중에 싱가폴로의 휴가 출발일이 점점 다가왔다. 카드 사용으로 몇 년 동안 모았던 항공사 마일리지로 몇 달 전에 싱가폴행 항공권을 끊었는데 벌써 그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싱가폴은 더울테니 거기에서 달리기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난생 처음으로 러닝화와 반팔, 반바지 운동복을 여행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으며, 그곳에서의 달리기를 기대해보았다.


코로나로 인해 몇 년 만에 가본 해외여행은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한국 방역수칙이 적용되어 마스크를 썼었지만, 싱가폴에 내리니 마스크를 끼고 있는 사람은 우리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싱가폴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가 이미 해제되었다는 것을 출발 전에 알고는 있었는데, 이 정도로 마스크를 쓰지 않으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더운 날씨에 마스크를 쓰고 뛰는 것은 고역일 수 밖에 없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이번 달리기가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 12시가 넘어 도착을 했기에 도착한 다음날에는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30도가 넘어가는 이곳 날씨와 저녁 늦게까지 관광 일정이 이어질 수 있는 점을 생각해서, 저녁이 아닌 아침 일찍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잊지 말자. 여행을 온 와중에 시간이 되면 달리기를 하는 것이지, 오래간만의 가족 여행이 달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안된다. 여행 끝날 때까지 마음에 잘 새겨두기로 했다.


하루가 더 지나 드디어 대망의 첫 달리기 날 아침이 찾아왔다. 운동화와 운동복은 찾기 쉽게 전날 저녁에 미리 챙겨두었고, 혹시 길을 잃어버릴 경우에 대비해서 주머니에 현금도 약간 넣어두었다. 코스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미리 구글맵에서 찾아두었는데, 호텔이 있는 클락키에서 출발해서, 호텔 옆으로 쭉 이어지는 강변 산책로를 따라 가면 호수 같이 생긴 마리나 베이가 나오고 여기를 한 바퀴 돌고 다시 호텔로 오는 것으로 코스를 정했다. 이렇게 뛰고 오면 거리가 7키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7키로를 뛸 수 있는 현재 상태에서 적당한 코스로 보였다.


낯선 곳에서의 달리기라니,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숙소를 나섰다. 아직 아침 6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라 거리는 깜깜했지만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듯 저 멀리에서부터 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어제 생각했던 코스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며 출발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옆으로 누군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러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복장을 한 채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반가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심지어 나와 같은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이 사람을 따라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준비운동도 생략하고 길을 나섰다.


몇 번 숨을 들이쉬니 며칠 전까지 있던 한국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코를 찌릉하게 만드는 찬 공기를 느꼈던 며칠 전까지와는 달리, 약간은 축축하면서도 따뜻한 공기가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반 년 전 한국의 여름날 아침을 생각나게 했다. 좀 더 뛰어가니 아침 일찍 문을 연 식당 근처에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향신료 냄새가 훅하고 코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다른 날씨, 낯선 냄새, 생각하지 않아도 감각을 통해 외국임을 느낄 수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전날 늦게까지 장사를 한 흔적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술병으로 가득찬 박스가 가지런히 쌓여 있는 골목을 지났고, 몇 층인가를 세어본 높은 오피스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기도 했으며, 강변 멋진 곳에 자리잡은 고급 호텔의 야외 조식당에서 이제 막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면서 탁 트인 물가에 도착을 했다. 싱가폴을 대표하는 멀라이언 동상이 있는 마리나 베이였다. 호수처럼 생긴 만의 반대편으로는 옥상에 배 모양의 수영장이 있는 마리나샌즈베이 타워가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이곳이 마리나 베이라는 것은 관광책자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마침 저 앞쪽 바다 너머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어 더욱 운치가 있었다.


이쯤 오니 지금까지보다도 러너가 훨씬 많아졌다. 나보다는 한층 위의 전문적인 복장을 한 사람도 있었고, 몇 명이 함께 무리를 지어 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순간 나를 앞질러 갔다. 딱봐도 탄탄해 보이는 몸에 민소매 싱글렛, 무슨 브랜드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수들이 신을 것만 같은 신발로 무장한, 전문가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다른 때 였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괜한 오기가 발동을 해서 한 번 앞질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만큼 앞서 가는 아저씨를 따라잡으려면 나도 발을 열심히 굴러야 하는 법. 관광객 모드에서 러너 모드로 변신하고 따라가보았다. 한참을 달리자, 핸드폰 앱에서는 평균속도는 4분 사십 몇초라는 음성이 나왔다. 그렇다 내가 한 번도 안 달려본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저씨와의 거리를 좀처럼 좁힐 수가 없었고, 결국 나는 현실을 인정하고 다시 속도를 늦추었다.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덕분에 최고로 빨리 뛰었습니다. 무리한 탓인지 목이 너무나 말랐다. 가지고 나온 물도 없고, 한국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편의점도 주위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반 바퀴 정도 뛴 마리나 베이의 나머지 반을 마저 뛰어야만 호텔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속도를 늦춰 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관광객 모드로 돌아와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달리니, 다행히도 목마름이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기분도 좋아져서 잠깐씩 멈춰서 사진도 찍으며 달리기를 이어나갔다. 여기는 무슨 미술관 같은데 강가에 있는 정원이 멋지구나 이따 가족들과 여기에 와서 커피 한 잔 해야겠다, 현지 식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 맛집인가 보다, 여기 와서 아침 먹어야겠다는 등 동네 정보를 습득하며 뛰다 보니 어느덧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 이르렀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호텔방의 불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가족 모두가 곤히 자고 있었다. 이따가 아이들이 일어나면 오늘 계획된 일정을 진행하면 되니, 여행에 지장 없는 오늘의 달리기는 성공이라 부를 만 했다.


사실 여행을 와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쉬러 와서 무슨 운동을 하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을 넘지 않는 것이 우리 가족의 여행 모습이기는 하지만, 짧은 여행 기간 재미난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는데, 그 시간을 아껴서 운동을 하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행을 와서 달리기를 해보니 지금까지의 생각은 편견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아침 달리기를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사람들로 붐비는 것이 아니라, 한적하면서도 평화로운 색다른 모습의 여행 명소를 만날 수 있다. 그 날 아침 달리기에서 보았던 멀라이언만 해도 낮 시간 동안에는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설 정도의 명소인데, 일찍 간 덕분에 관광객 없는 조용한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성당이나 사찰과 같은 종교적인 장소를 조용한 아침 시간에 구경을 하면 고즈넉한 경관에 보다 경건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보기 어렵던 것들을 아침 달리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부산으로의 여행이라면, 해운대 해변을 달리면서 도심지에서는 보기 어려운 일출을 목격하는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고, 동남아 어디의 아침 시장이 서는 곳이라면, 상인들과 구경꾼이 북적이는 이른 아침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침의 짧은 달리기가 전체의 여행일정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하루를 일찍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당연한 얘기라서 굳이 길게 덧붙이지는 않겠다.


이렇게 시작된 여행지에서의 아침 달리기는 그 뒤의 여행에서도 쭉 이어졌다. 어느새 러닝화와 러닝 복장이 여행 필수품으로 추가가 되었고, 근처에 달릴 만한 곳이 있는지가 숙소를 정하는 우선순위가 되었다. 도심지에서는 신호등 때문에 달리기 흐름이 계속 끊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는 신호등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해변이나 큰 공원 주위에 있는 숙소를 잡으면 아침 달리기의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 것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참 뒤에 아내도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면서부터는, 함께 달린 후 근처에 있는 문을 일찍 여는 까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새로운 즐거움이 생기기도 했다.


색색의 즐거움으로 가득찬 여행에 달리기라는 또다른 즐거움이 하나 더 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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