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마라톤 신청접수 - 참가종목은 하프, 10km, 5km" 올해의 과천 마라톤 대회 개최를 알리는 현수막이 동네 곳곳에 붙었다. 작년에는 11월에 대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5월에 열린다고 한다. 이렇게 자주 대회가 열리나 싶기도 했지만, 내가 참가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자주 개최되면 러너들에게 오히려 많은 기회가 생기는 법이지 않는가. 지난 번 대회 때를 생각해보니, 5km 부문은 보다 편한 마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았고, 10km 부문은 사람들의 복장에서도, 달리는 모습에서도 뭔가 다른 것이 느껴졌었다. 러너는 10km를 달리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별된다고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고, 이번 대회를 마치면 나도 진정한 러너로 재탄생한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10km로 신청을 했다.
대회인 5월까지는 앞으로 두 달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뛰는 거리를 매달 1km씩 늘이자는 계획은 다행스럽게도 착착 진행이 되어 벌써 한 번에 9km를 달리고 있었으니, 이대로 시간만 흘러간다면 10km 완주에 문제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도 6분 페이스를 살짝 넘는 것으로 봐서, 대회에서는 일단 1시간 안쪽으로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달리기의 본질은 정해진 거리를 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니, 빨리 달리는 것이 당연히 중요한 것 아니냐, 대회날에는 최고의 기록을 내고 말겠다는 생각에 전의에 불탔다. 지나고 보니 그때와는 생각이 조금 달라져서, 무조건 빠르게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빠르게 뛸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서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3월이 되어 봄으로 접어드니 날씨도 점점 따뜻해졌고, 그 덕분에 그 동안 느슨해졌던 달리기에 박차를 가하기도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 동안 달리기 생활에 몇 가지 큰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운동시간을 밤 늦은 시간에서 아침 이른 시간으로 옮기게 되었다. 싱가폴 여행 기간을 이용해 아침에 달리기를 해보니, 하루를 일찍 시작할 수 있어 낮 시간이 길어지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밤 시간에 달리기를 하고 오면, 운동 때문에 각성이 되는 것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도 많았는데, 그런 것을 피하고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 달리기를 실천에 옮겼지만, 때마침 그 무렵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날도 많아져서, 그렇게 일한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일도 꽤 생겼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몇 번의 시도를 해본 끝에 끝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 달리기 횟수는 주중에 2회, 주말에 1회 아침에 달리기를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매번 전력달리기 태세로 뛰었기에 연달아 이틀을 달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고, 만일 그렇게 한다면 몸에도 부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하루 운동하면 그 다음날은 가급적 쉬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전문용어로 하뛰하쉬(하루뛰고 하루 쉬고)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리고 주말 하루 중 아침에 운동을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느냐 마느냐는 순전한 내 의지에 달린 문제이기에 내 마음만 잘 다스리면 주말 하루 운동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주 3회 아침 달리기는 다행스럽게도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어느덧 두 달이 지난 대회 당일이 되었다. 5km 대회와 달리 10km 대회는 놀랍게도 주최측에서 공식적으로 기록을 측정해준다고 했다. 대회 며칠 전에 주최측에서 집으로 보내준 택배 박스 안에는 긴 종이테이프 처럼 생긴 것이 들어 있었는데 이 종이테이프에 기록을 측정하는 전자칩이 부착되어 있고, 종이테이프를 신발끈에 연결해 놓으면 전차칩을 통해 기록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10km 부터는 진정한 러너들이 참가하는 것이니 기록이 중요해지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진정한 러너가 되고 싶어하는 내가 첫 10km 대회의 출발장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민 시계가 없어 서 러닝벨트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알려주는 음성을 통해 달린 시간을 계산하고, 발매 3년이 넘어서 주위에서는 좀처럼 찾아 보기 어려운 젤카야노 25를 신고 있으며, 심지어 썬글라스와 모자가 필요한지도 몰라서 쏟아지는 햇살을 눈쌀을 찌푸리는 것으로 물리쳐보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10km 완주자가 될, 진정한 러너로 재탄생할 내가 출발선에 선 것이었다.
출발선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대회에 함께 온 듯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와중에, 누군가의 이런 얘기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오늘 컨디션은 어때? 어떻게 뛸거야? 응, 오늘 컨디션 별로인 것 같아서 펀런(fun run)할 건대 천천히 430 페이스로 뛰려고. 뭐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동공이 커지며 말을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천천히 뛰는데 430 페이스라고... 나는 전력을 다해서 600 페이스로 달리는 것이 목표인데... 430 페이스는, 1km를 4분 30초에 달리는 속도를 말하고, 이를 시속으로 바꾸면 무려 시속 13km가 넘는 속도이다. 심지어 이 속도를 유지하며 하프마라톤을 완주하면 1시간 34분 정도의 엄청난 기록이 나온다. 혹시 주위에 달리기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 보시면 된다. 하프 마라톤 1시간 34분이 어느 정도인지를... 내가 달리기를 계속한다해도 아마도 앞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기록일 것이다. 미러 썬글라스라고 하는 불투명의 썬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썬글라스 속의 눈동자를 알아 볼 수는 없는, 430 페이스로 펀런을 한다는 그 분을 흘깃 쳐다보며, 나는 핸드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넣어둔 러닝벨트의 허리끈을 다시 한 번 동여매었다. 이분들이신고 있는 신발의 쿠션은 왜 이렇게 높고도 좋아 보이는지.. 얄팍한 쿠션을 자랑하는 과거 기술력의 젤카야노25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주위를 둘러봐도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5, 4, 3, 2, 1, 출발" 출발신호와 함께 사람들이 출발선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출발선을 사람들이 통과할 때마다 어디선가 삑삑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까 말한 신발끈에 연결된 전자칩이 출발선 바닥에 있는 센서와 잘 연결됨을 확인해주는 소리라고 했다.
일단 나는 10km 주자들의 무리 중 뒷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나가는 10km 대회이니 앞자리에서 빨리 뛸 것 까지는 없어 보여서였다. 그렇게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뒷부분에서 뛰고 있었는데, 조금 지나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이야 그렇다 쳐도, 조금만 지나니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를 재낀 것이었다. 어, 이거 뭐가 잘못됐나, 이대로 가다가는 내 뒤에 사람이 없겠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연습할 때도 페이스 조절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기에, 출발하면서부터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고, 힘들다 싶으면 그제서야 천천히 달리는 것이 내 달리기 방법이었는데, 오늘도 초반부터 터질 듯한 심장페이스로 달리게 된 셈이었다.
조금 더 달리니 2km지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앱 속의 음성과 함께 5분 20초 페이스라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 6분 페이스 전후로 뛰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말도 안되게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것이었다. 1km당 40초 차이가 얼마 안 되는 차이일 것 같지만, 실제로 뛰어보면 엄청난 차이이다. 다행히도 아직은 뛸만했고, 이대로 가면 신기록 달성이라는 생각에 순간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발걸음을 옮겨서 계속 가니 드디어 첫번째 급수대가 나왔고,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멈추지 않고 물 한 컵을 낚아채어 뛰면서 물을 마셨다. 가득 차 있는 물 중에서, 흘리는 것 절반 마시는 것 절반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바로 그 때 저기 반대편에서 엄청나게 빨리 뛰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바로 옆을 지날 때는 그분들은 정말 쓩하고 지나갔다. 이렇게 빨리 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반환점을 돌아온 10km 대회 선두권 참가자들이었다.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정도의 비인간적인 속도로 달리는 분들을 처음으로 보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환점을 돌아서 골인 지점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내가 반환점까지 가야할 길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것 같았다. 숨은 점점 가빠졌고, 힘들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시점에 드디어 반환점을 돌았다. 반환점 부근에서는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많은 힘을 쏟아부어서 당장이라도 입으로 가져가고 싶었지만, 먹고 바로 뛰었던 어느 날 배가 아팠던 생각에 이번에는 패스하기로 했다. 주로가 평소에 늘 달리던 곳이라 자신 있다 생각했건만, 꽤 더운 20도가 넘는 날씨 속에서 한참을 달렸더니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아직 새벽의 온도가 이 정도는 아니었기에 좀 더 서늘한 새벽녁 날씨에 익숙해졌던 나로서는 빠르게 지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달려온 것리보다는 거리보다는 가야 할 거리가 적으니 힘을 내보기로 했다.
매번 달리는 곳이라 다행히도 거리감은 충분했다. 저기 앞에 보이는 다리까지 가면 이제 3km만 남았고, 거기에서 좀 더 가서 터널을 통과하면 겨우 1.5km 남았고와 같이, 머리 속으로 남은 거리가 얼마인지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은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달리는 곳이라 설상가상으로 눈이 많이 부셨다. 정면을 보기가 힘들어서 고개가 자꾸만 땅쪽으로 숙여졌다. 사람들이 썬글라스를 쓰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었는데,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이 시간에 뛰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썬글라스의 필요성을 알 리가 없었다. 모자도 왜 쓰나 싶었는데,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계속 훔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연스레 모자의 필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곳처럼 그늘 한점 없는 곳에서는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흘러 내리는 땀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자가 필요하겠다는 것 말이다. 기다려다 데카트론, 조만간에 다시 방문해서 썬글라스와 모자를 사고 말테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구간인 작은 오르막이 보였다. 이삽심미터 정도 되는 업힐을 올라가서 바로 왼쪽으로 틀고, 이어서 트랙을 조금만 달리면 결승선이다. 할 수 있다를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외치며 오르막을 지나, 마침내 트랙에 진입을 했다. 결승선까지 이어지는 트랙 주위에서는 응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를 응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파이팅 소리가 오늘은 나를 위한 응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십미터, 오미터, 드디어 골인이다. 터질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나이키앱의 운동종료 버튼을 눌렀다. 55분 30초. 놀라움에 만세 소리를 외칠 뻔 했다. 역대 최고 기록이다. 5km를 걷는 것도 힘들어하던 내가 10km를 뛰다니, 스스로가 너무나도 대견했다. 부상으로 받은 완주메달을 집까지 목에 걸고서 갔다. 동네사람들, 내가 10km를 55분에 뛴 사람입니다. 이것보세요라고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