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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유목민 Jan 05. 2022

실천은 선택 문항이 아니다

일반 공립학교가 카페와 식당을 차린 이유

글로벌 뉴스에서 식당을 차려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는 미국의 고등학교 사연을 전했다. 그런데 식당의 스케일이 놀랍다. '우리 학생들이니 예쁘게 봐주세요.' 정도가 아닌 '미슐랭 스타를 목표로 하는 식당' 수준의 거대함과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고등학교가 특목고, 자사고, 대안 학교, 마이스터고도 아닌 일반 공립 고등학교였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뉴스 앵커는 앞으로 카페와 식당 영업을 준비 중인 미국 공립고등학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말로 뉴스를 마무리했다. 나는 그 뉴스가 끝났는데도 한참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식당의 구성원이라면 감당해야 할 질문들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우리 식당의 가치는 무엇인가?' 

    -> 철학, 윤리, 경제, 사회


'우리 식당의 mission statement는?'

    -> 철학, 윤리, 경제, 사회


'맛있는 음식의 레시피를 어떻게 개발할까?'

    -> 과학적 탐구 방식(연역과 귀납), 실험통계, 화학, 물리, 역사 등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일까?'

    -> 심리학, 철학, 화학, 물리


'우리 식당은 장애인 고용을 해야 할까?'

    -> 철학, 윤리, 경제, 경영, 사회


'회의 시간에 어떻게 하면 식당 구성원들이 질문과 의견 제시를 많이 할 수 있을까?'

    -> 심리, 경제, 경영, 정치


'식당 구성원끼리의 의견 조정은 어떻게 해야 할까?'

    -> 정치, 거버넌스, 사회, 법


'식당 정책과 매뉴얼은 어떻게 결정할까?'

    -> 정치, 거버넌스, 사회, 법


'식당의 성과를 어떻게 측정해야 옳은 것일까?'

    -> 심리, 통계, 경영, 윤리


'경영진과 직원의 임금은 어떻게 산정해야 옳은 것일까?'

    -> 정치, 경제, 경영, 윤리, 사회, 법


'어떻게 하면 고객에 대한 양질의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얻을 수 있을까?' 

    -> 심리, 경제, 경영, 정보, 전산


나는 사회생활 경험이 없으며, 교양 수준이 낮고 불균형한데도 이렇게 많은 질문이 나오고, 이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오랜 과거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연구하고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그렇게 생산된 많은 지식 중 시간의 시험을 견딘 지식들만이 엄선되어 각 분야의 교과서에 수록된다. 놀랍게도 심리, 거버넌스를 제외한 모든 과목들은 내가 고등학교 때 들어봤거나 수능을 본 과목들이다. 학생들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질문을 하는 법과 질문에 대답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질문의 경우 교사나 각 분야 외부 전문가(타학교 교사, 학부생, 대학원생, 교수, 기업체 임직원 등)를 초빙하여 컨설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로컬 지식 생태계를 구성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본다. 지필 고사가 아닌 현실의 업에서 교과서의 지식을 검사받고 강화하는 것이다.


시험을 보는 학생의 입장에서 시험의 맹점은 시험에 쉽게 나오거나 출제되지 않는 지식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식들이 현실에서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도. 예를 들어, 음식 레시피 개발 지식이 과학적 탐구 방식이 연결될 수 있다고 서술했는데,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 지식은 내신, 수능, 모의고사 통틀어 출제된 횟수가 손가락에 꼽았고, 출제된다고 해도 눈치가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도 손쉽게 풀 수 있을 정도로 출제되었다. 현실의 일이 아닌 시험지로 역량을 평가받았으니 나는 이 지식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교과서에서 '학습활동'이라고 불리는 실천 문항들을 충실히 이행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 때까지도 미뤄온 실천 문항들을 이제 와서 몰아서 하려니 너무 힘들다.


자, 이제 초등학교 교과서를 펼쳐 실천할 학습활동을 찾아야겠다.


The whole of science is nothing more than a refinement of everyday thinking.
-Albert Ei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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