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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Jan 29. 2018

인천 씬에 주목하다

‘씬’이라는 말이 있다. 한글로 보자니 꽤 낯설지만, 익숙한 영어, ‘scene’이다. ‘scene’의 의미 가운데, 간단히는 한자어 계(界)나 프랑스어 장르(gnere)로, 학문적으로는 ‘일상적인 흐름을 벗어난 문화적 수행이나 소동 혹은 난장, 그리고 카니발이 일어나는 문화적인 생성의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Scene은 W. Straw(1991)가 몬트리올의 음악생산의 공간의 예를 들며 제시한 개념으로, 영어의 용례에서 “일을 벌이다” 혹은 “무언가 소동을 일으키다” (making a scene)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을 활용했다. 특정 지리적인 단위인 지역성(locality)을, 닫힌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열린 경계성(porous boundary)에 의미를 두는 개념이다.)

우리말 대신 꿋꿋이 영어 그대로를 가져와 ‘음악 씬’, ‘인디 씬’, ‘힙합 씬’, ‘홍대 씬’ 같은 말에 쓰일 때가 바로 그 의미이다.

 

1년 여 전, 인천시민이 된 나는 요즘 ‘인천 씬’에 주목하고 있다. 주입식 광고의 힘은 놀라웠다.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오가며 보게 되는 대형 현수막들은 인천은 음악의 도시요, 다양한 축제의 도시라고, 심지어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고 새내기 인천 시민인 내게 1년 내내 얘기했다. 사운드 바운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개항장 밤마실 음악회, 지역 노랫말 공모전 등 인천 지역의 다양한 음악관련 축제에 대한 광고가 끊이질 않았다. 집에서 보이는 인천대교를 배경으로 한 하늘에서는 꽤 여러 번의 주말마다 불꽃이 그림을 그리며 터져 올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자꾸 보이면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솔직히 ‘인천’하면 떠오르는 것이 최근의 ‘재정위기’ 정도였던, 인천에 대해 말 그대로 ‘무지막지’했던 내게는 꽤 의아했다. 궁금해졌다. 음악도시라 자처하는 인천에 대해 그리고 ‘인천 씬’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인천은 조선시대 말, 외세와 직접 대면한 곳이었다. 정확히는 제물포를 중심으로 외국 것들이 우리 것들과 본격적으로 맞닿게 된 곳이었다. 조선이 1876년 일본과의 조약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와 차례로 ‘수호조약’이란 것을 체결할 때 직접적인 무대가 되었으며, 개항을 통해 근대적 항만시설이 생기고 통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각 국 영사관이 설치돼 많은 외국인들이 활동하는 근거지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 문화가 만나고 섞일 수 있었던 도시로 인천을 주목해 볼 수 있는 이유이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만든다. 그 곳에서부터 찬송가와 함께, ‘창가’(唱歌)라는 명칭의 서양음악이 들려지고 불리어진다. 인천은 서양 음악과 서양 음악가가 최초로 상륙한 곳으로, 서양 음악을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렇게 ‘인천 씬’은 태동한다.

교회 밖 공간에서 서양 음악 활동이 이뤄진 것은 1920년 전후의 일이었단다. 1920년 8월 19일 오후 8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극장 중 하나였던 인천 ‘가무기좌’에서 서양음악에 익숙한 중국 악사와 조선인들로 구성된 악단의 ‘동서음악대회’라는 음악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당시 무려 천 여 명에 달하는 관객이 들어 대성황을 이뤘고, 기부금으로 273원 84전을 모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살펴본다.     


仁川의 音樂大會
仁川府內里漢勇團에서는 從來經費의 困難으로 그團의 目的物이 되는 體育機關이 不完全함을 常侍慨歎하던 바 該團長郭尙勳氏의 活動과 仁川以友俱樂部의 後援으로 京城朝鮮古樂選手諸氏와 中國樂師男女及朝鮮人으로西洋樂에 宿工이 富한諸氏로 編成된 東西音樂大會를 仁川府歌舞技座에서 去十九日下午八時에 開演한바 當夜觀覽人이 無慮千餘名에 達하야 大盛況을 呈하얏는대當日寄附金이 二百七十三圓八十四錢이라더라(仁川) - 동아일보 1920.8.24.4면


1920년대 초반 인천 인구 수가 한국인은 2만4,000여명, 일본인은 1,300여명 정도라 하는데, 1,000여명의 관객이 들었다는 것은 엄청난 인파였으리라 짐작된다.

궁금해진다. 극장 안팎에서 낯선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어떤 감흥을 느꼈을까? 낯선 소리지만 귀와 마음을 사로잡았을, 그동안 들어왔던 소리와는 달랐을 것에 어떤 감정이 오고 갔을까? 그 감정을 감히 짐작하여 글로 옮겨 보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 보나 능력 밖이다.


과거 개항장에서 창고 등으로 쓰였던 1930~4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은 최근, 예술인들이 모일 수 있는 근거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인천시는 1883년 개항 이후 건립된 건축문화재 및 1930~4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잘 보존된 구역인 인천시 중구 해안동 일대를 재생하며, 舊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한 근대  건물 등을 리모델링하여 창작스튜디오, 공방, 자료관, 교육관, 전시장, 공연장 등 총 13개 동 규모의 ‘인천아트플랫폼’을 조성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옛 건물들과 더불어 거리 자체가 하나의 근대 박물관 같은 느낌을 주어 드라마 ‘도깨비’ 등 다양한 미디어에 등장해 많은 이목을 끌고 있다. 차이나타운으로 유명해 일찍이 관광객을 모았던 과거 중국 조계지와 더불어, 일본인 조계지였던 곳은 근대 역사를 소재로 이야기를 입은 거리로 탈바꿈해 색다른 분위기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2017년 늦가을 주말에 찾았던 인천 개항장 아트플랫폼 공연장에서는 인천 지역 스윙댄스 동호회가 발표회를 하고 있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스윙 형식의 재즈 음악과 함께 발전해온 춤을 즐기는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100년의 시간이, 같은 공간을 통해, 중첩되는 경험을 맛볼 수 있었다.



 100년 전, 개항이후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몰려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 했던 땀방울 굵었을 우리 민중의 억울함과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겪어야만 했을 지독한 아픔은 잠시 마음 한 구석에 숨겨두고, 다시 한 번 문화적 측면에서 그 시간을 들여다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사 울고 간다.」 와 같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를 당시 절망과 비탄의 마음이 담긴 노랫가락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조금은 다양한 음계의 소리가 귀에 들리고 입으로 전해지더니, 낯선 소리의 악기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양(洋) 음악’이 이것저것 들리는가 싶더니 거기에 맞춰 몸을 움직여 ‘딴스’를 하게도 되었다. 전쟁 이후 미군 주둔지 근처에 클럽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또 다른 음악들에 사람들은 매료된다. 그렇게 완전히 이질적이었던 문화와 음악은 알게 모르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다양하게 섞이며 100년의 시간을 지나온다. 다양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후손들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에 쉽게 다가가 활발히 활동한다. 인천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한국 록의 중심 시로, 헤비메탈의 도시로 자리 잡아간다. 수많은 인디밴드들을 배출하는 등 음악적 토양이 두텁게 쌓여간다.  그렇게 ‘인천 씬’은 무르익어갔다.


인천은 그렇게 일찍이 다양한 것들이 섞일 수 있었던 ‘수혜’의 도시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오히려 더욱 더 많은 것을 쉽게 내어주고 ‘인천 씬’은 급속히 그 빛을 잃어갔다. 그 명멸의 과정을 지켜보던 인천의 음악인들은 최근 자생적으로 자신들의 ‘씬’을 가꾸고 복원하여 성장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198,90년대 활발했던 인천의 밴드 음악 문화가 서울의 홍대 주변으로 그 중심이 옮겨진 후, 변방이 돼버린 인천 신포동 등지에서의 노력이 눈에 띈다. 다시금 밴드음악의 산실 역할을 다시 하고 있는 글래스톤 베리 등 과거 활발했던 인천 씬을 재창조하려는 음악 관련 공간들이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려 시도하고 있다. 이방인인 나 같은 사람에게 ‘인천 씬’을 궁금케 했으니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어떠한 문화를 향유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문화의 원류(原流)를 더듬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발원지를 찾아 그 공간이 갖는 역사성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 자체가 현재의 것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인천의 역사와 음악, 그리고 공간을 중심을 한 문화적 움직임을 응원한다. 그야말로 ‘일상적인 흐름을 벗어난 문화적 수행이나 소동 혹은 난장, 그리고 카니발이 일어나는 문화적인 생성의 공간’으로서 인천을 주목한다. 아무쪼록, 역사적 공간의 이야기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도시로서 인천이 우뚝 서길 기대한다. 나아가 ‘인천 씬’이 우리 대중음악사에 다시금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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