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조식에 대하여

왜 나는 볶음밥에 집착하는가

by 기억의 틈

여행을 가면 꼭 하는 일이 있다.

호텔 조식을 먹는 것.


아무리 늦게 잤어도, 얼굴이 퉁퉁 부어도

아침 9시 전에 일어나서 식당으로 달려간다.

조식은 시간과의 싸움이니까.

슬리퍼를 끌고 호텔 식당에 들어서면

세상 온갖 음식들이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통 안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나를 유혹한다.

베이컨, 소시지, 스크램블에그, 과일, 빵, 도가니탕......

그야말로 ‘무엇을 먹어도 행복할 권리’가 보장된 천국.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매번 같은 곳으로 걸어간다.

아침 볶음밥 코너.


호텔 조식의 숨은 MVP, 볶음밥

별거 없어 보이는 이 음식에 나는 미친 듯이 집착한다.

심지어 줄을 서면서부터 속으로 다짐한다.

'오늘은 딱 두 접시만. 진짜, 이번엔 진짜로.'


하지만 이 다짐은 늘 5분을 못 버틴다.

첫 숟갈을 입에 넣는 순간 나는 깨닫는다.


"아, 세상에는 지켜야 할 결심과 깨야 할 결심이 있다."

볶음밥 앞에서는 무조건 깨야지.


호텔 조식 볶음밥은 뭔가 다르다.

진짜 뭐랄까,

다른 차원의 맛이다.


집에서 후다닥 볶아 먹는 볶음밥과는 전혀 다른 세계.


한 숟갈 뜨면 밥알은 고슬고슬하면서도 촉촉하고,

부드러운 버터 향이 퍼지다가

어디선가 살짝 스치는 불향이 혀끝을 간질인다.


그 사이사이에서 톡톡 터지는

옥수수, 햄, 당근, 완두콩의 하모니.

아침부터 작은 축제를 연 느낌이다.

볶음밥.

그저 아침을 때우는 데 충분한 음식을 넘어서

이제는 나에게 거의 신앙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왜 나는 호텔 조식에서 볶음밥에 이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첫째, 기술력.

호텔 주방은 화력이 다르다.

집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불 세기로

밥알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둘째, 마음가짐.

'나는 지금 호텔에 있다'는 마음가짐.

깨끗한 테이블, 고요한 조명,

조심조심 움직이는 직원들.

모든 게 조용히 속삭인다.

"지금 네가 먹는 이 볶음밥, 엄청 귀한 거야."


셋째, 시간의 농도.

평소엔 허겁지겁 먹지만

호텔 조식은 다르다.

식탁에 앉아 천천히, 정말 천천히 음식을 음미한다.


볶음밥 한 숟갈, 커피 한 모금.


옆 테이블 아이가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느긋하게 바라보게 된다.


아마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호텔 볶음밥을 이토록 황홀하게 만드는 거겠지.

살다 보면

불 조절 실패해서 확 타기도 하고

물 조절 실패해서 질척거리기도 하고

까맣게 눌어붙어서 냄비 버릴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조금 식혀서 다시 볶고

맛없으면 케찹이라도 뿌리자.

어차피 인생 볶음밥에 정답은 없다.


나는 다시 접시를 들고 볶음밥을 한가득 퍼 담는다.


그렇게 어느 호텔 식당에서 나는

또다시 접시를 깨끗이 비웠고

입가엔 미소 한 숟갈이 남았다.


어쩌면 그게

여행에서 제일 맛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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