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브러져(징고)

나의 20대, 아직도 지우지 못한 플레이리스트

by 기억의 틈
징고(널브러져)

요즘은 소셜미디어 게시글을 통해 그 사람의 성향을 확인하곤 한다. 어떤 글을 올리는지, 어떤 사진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화를 내는지 같은 것들을 보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대신 다른 방식이 있었다. 바로 MP3 플레이리스트였다.


친해지기 전이거나 아직 서로를 잘 모를 때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요즘 무슨 노래 들어?” 혹은 “플레이리스트 좀 보여줘.” 그러면 그 사람이 듣는 노래 목록을 보면서 괜히 혼자 상상을 했다. 이 사람은 조용한 편이겠군. 이 사람은 생각보다 까칠하겠군. 이 사람은 감성이 좀 있는 사람이겠네. 물론 노래만으로 사람을 다 알 수는 없다. 음악 취향이 곧 그 사람의 성격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내 느낌상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나는 아직도 20대 때 듣던 플레이리스트를 그대로 듣는다. 휴대폰이 몇 번이나 바뀌고 음악을 듣는 방식도 스트리밍으로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때 듣던 노래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딱히 지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새로운 노래를 열심히 찾아 듣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가끔 예전 플레이리스트를 켜 놓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때의 공기 같은 게 같이 떠오른다. 학교 근처 골목, 늦은 밤 버스 창밖, 괜히 이유 없이 우울했던 날들, 별일도 아닌데 웃고 떠들던 밤들 같은 것들이 노래 사이사이에서 슬쩍슬쩍 올라온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노래 중에서 나를 가장 잘 나타내는 노래는 무엇일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노래가 아닐 수도 있고 가장 유명한 노래도 아닐 것이다. 그냥 이상하게 나와 닮아 있는 노래. 그런 노래가 하나쯤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떠오른 노래가 있다. 징고의 ‘널브러져’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밴드 슈퍼키드의 멤버인 징고가 부른 노래다. 아주 화려한 노래도 아니, 그렇다고 엄청난 메시지를 던지는 노래도 아니다. 그냥 느긋하고 조금은 힘이 빠져 있고 어딘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흘러가는 노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널브러져 있고 싶어진다.

특히 이 가사가 좋다.


널브러져 널브러져 널브러져

널브러져 저 태양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으니

우린 더 보송보송해 질 거야


보통은 더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더 버텨야 하고, 더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더 보송보송해지기 위해서 내가 뭔가를 애써서 할 필요는 없다고. 그냥 나를 비추고 있는 저 태양이 나를 보송보송하게 만들어 줄 테니 나는 그저 널브러져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해석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때의 나에게는 그 말이 꽤 큰 위로가 됐다. 늘 물에 젖어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계속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 이 노래를 들으면 괜히 마음이 조금 말라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애써 버티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냥 잠깐 널브러져 있어도 괜찮은 시간 같은 것 말이다. 이 노래는 내게 그런 시간을 허락해 주는 노래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끔 이 노래를 듣는다. 여전히 같은 부분에서 멈춰서 같은 생각을 한다. 아마도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노래가 있다면 지금까지는 이 노래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누군가가 내 플레이리스트를 본다면 그 사람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상상할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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