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차(브로콜리 너마저)

지친 밤마다 우리는 양양을 꺼내 본다

by 기억의 틈
브로콜리 너마저(유자차)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대학생 때였다.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던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때의 나는 이 노래를 “좋긴 한데 너무 잔잔하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딘가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조용한 노래라고.


특히 한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때의 나는 그 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 재밌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행도 더 갈 거고, 새로운 사람도 계속 만나게 될 거고, 세상은 아직 재미있는 일로 가득해 보였다.

그런데 굳이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좋은 일들은 계속 생길 테니까.

굳이 꺼내어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날은 일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어느 날은 괜히 아무 이유 없이 기운이 빠지고

어느 날은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지치고 생각보다 자주 흔들린다.

그래서 이제는 그 가사가 조금 이해된다.

좋았던 기억을 켜켜이 묻어 둔다는 말.

그건 아마도 언젠가 마음이 너무 힘들 때 꺼내어 먹을 수 있는 작은 단맛 같은 것이겠지.


요즘 회사는 가장 바쁜 시즌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흘러간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몸과 마음이 둘 다 조금 지쳐 있다.

아내도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서로 “오늘 어땠어?”라고 묻지만 길게 설명할 힘도 없을 만큼 피곤한 날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요즘 우리에게는 작은 습관이 하나 생겼다.

유자차는 아니지만 생강차를 한 잔씩 타 마시는 일이다.

늦은 밤일 때도 있고, 어떤 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마실 때도 있다.

컵에서 김이 천천히 올라오고 생강 특유의 알싸한 향이 퍼지면 조금 전까지 무겁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진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작년 가을에 다녀온 신혼여행 이야기.

비행기에서 창밖을 보며 “가서 돌아오지 말자!” 하고 웃었던 순간.

낯선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작은 식당에서 먹었던 저녁.

별것 아닌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


가끔은 연애할 때 자주 가던 양양 이야기도 꺼낸다.

바다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파도를 보던 밤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서 모래사장에 누워 있던 시간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들었던 노래들.

그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둘 다 조금 웃게 된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게 바로 그 가사였구나.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이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꽤 많은 기억들을 설탕에 묻어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신혼여행의 가을바람도, 양양의 파도 소리도, 아무 일 없던 평범한 저녁들도.


그리고 이렇게 지친 밤에 그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다시 하루를 버틸 힘이 생긴다.

생강차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면서 우리는 또 이야기한다.


“다음에 양양 또 가자.”

“신혼여행 때 그 거리 기억나?”


그리고 어느 순간 컵은 비어 있고 마음은 조금 가벼워져 있다.

아마 그래서 이 노래의 마지막 문장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지금의 계절이 조금 바쁘고 조금 지친 겨울 같은 시간이라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설탕에 묻어 둔 기억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쌓여 갈 것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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