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마다 소풍 May 03. 2021

미인 대회를 먹을 뻔하다

모르면 물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직도 먼 영어의 길. 부딪히면서 배우자고 시작한 미국 공립학교에서 특수학급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가끔 영어의 미로 가운데 서곤 한다. 그 미로에서 길을 잃을 때면 미로 밖에 있는 이들에게 질문한다. 부끄러움을 숨기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묻는다.




사무실에 가기 위해 교직원 휴게실을 지나가는데 미셀과 로잔이 같이 휴대전화를 보며 웃고 있었다. 미셀과 로잔은 버벅대는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 아줌마인 나를 늘 거리낌 없이 그들 중 하나로 받아들여주는 고마운 동료들이다. 반갑게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는 나에게 미셀이 물었다.

"너희 나라에도 피죤이 있니?"

흠...... Pigeon?  비둘기라면 말이지...... 한국에 있을 때 공원에 가면 바닥에 널려있던 비둘기 똥과 여기저기 음식 찌꺼기를 쪼아 먹으며 다니던 비둘기들이 떠올라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응, 있어. 공원에 가면 정말 많아."

"많아? 너희 나라는 피죤이 많아?"

로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응, 내가 어릴 때는 사람들이 비둘기를 잡아먹기도 했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는데 미셀과 로잔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웃기 시작했다.

"피죤을 먹는다고? 으하하하!"

순간적으로 내가 영어의 미로에 빠져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 Pigeon에 대해 이야기한 거 아니야?"

정색을 하는 내 표정에 미셀과 로잔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보고 있던 휴대전화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비키니를 입고 사자 머리를 한 늘씬한 여자들이 폼을 잡고 있는 미인대회 영상이었다. 비디오 어디에도 비둘기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Pageant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미셀이 설명을 해주었지만 당시 나는 Pageant라는 단어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나를 보고 로잔이 겨우 웃음을 멈추며 "Beatuty contest"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너희 pageant 발음이 pigeon처럼 들렸어."라며 그네들 덕분에  pageant라는 말을 배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고맙고 인사를 하고 아직도 킥킥대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사무실로 향했다. 

이후 한국에서는 미인 대회를 먹는다는 전설을 만들어낸 나는 종종 그들의 농담거리가 되곤 했다. 미셀과 로잔은 남들 앞에서 미인 대회를 먹을 뻔한 내 이야기를 꺼내며 내 실수가 너무 귀엽다고 놀렸다. 가끔 내 실수를 꺼내며 와그르르 웃는 그네들을 보며 그런 실수로라도 귀염을 받고 있어 다행이다 싶다. 



pageant : 1. 야외극, 가장행렬 2. 미인대회 3. 변화무쌍하고 흥미로운 것        <네이버 사전>

사전에서 발음을 찾아들어보니 전혀 다른 말인데 미셀과 로젠이 물어보는 순간에 나에게는 pageant가 pigeon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단어가 비둘기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종종 이렇게 미국인들의 발음에 속거나 내 귀가 둔해서 엉뚱하게 알아듣는다. 그들에게는 한국에서 온 아줌마의 실수가 엉뚱하고 재미있겠지만 그럴 때면 나는 영어의 미로에 빠진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미로에서 혼자 길을 찾느라 애쓰는 대신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잘못 알아듣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묻는다. 처음에는 부끄러웠던 실수하는 것에도 이제는 제법 덤덤해져서 어떤 때는 내가 먼저 나서서 물어보고 배운다. 그러면 그들은 의외로 담백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래서 오늘도 용기로 무장을 한 채 영어의 미로가 숨어 있는 미국 학교에 출근을 했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images/id-1701934/


매거진의 이전글 드디어, 코로나 19 백신을 맞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