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독감 백신 접종기간이 되면 약국이나 병원에서는 독감 예방 접종을 하라는 홍보 카드가 걸렸고, 보험회사에서는 접종을 받으라는 권고의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독감 예방 접종을 맞지 않고 지내왔다. 그런데 미국 생활 10년 만에 백신을 맞았다. 그것도 그 귀하다는 코로나 19 백신을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다행히 며칠 전 Red Tier로 내려가기는 했지만 캘리포니아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지난 몇 달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의 심각한 대량 확산 위험 상태를 의미하는 purple Tier 상태였다.
그런 중에도 내가 일하는 교육구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되자 교실 수업을 진행했고 온라인을 희망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매일 학교에 등교했다. 수시로 이 반, 저 반에서 학생과 교사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부분적인 격리 조치가 이루어지는 속에도 교실 수업은 계속되었고, 우리 반도 양성 반응을 보인 학생 때문에 2주간 교사와 아이들이 모두 집에서 격리하면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었다. 개인적인 위생을 철저히 하고 마스크를 열심히 착용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불안한 상태로 지속되는 교실 수업에 교사들과 교직원들은 늘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태였다.
미국에서 코로나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노령층과 의료관계자들의 백신이 시작되었지만 교직원들에게 백신의 기회는 여전히 남의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교육자들이 조기 백신 접종군에 속한다는 보도가 있었고 곧 접종이 시작될 거라는 기대가 퍼졌다. 그러나 백신 접종 예약 사이트에서는 학교에서 일을 한다는 정보를 넣고 예약을 잡으려고 하여도 기다리라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그러자 우리 학교 교직원들은 스스로 찾아서 백신 접종 예약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매일 수시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툭하면 코로나 방역 따위는 무시해버리는 특수학습의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나와 우리 반 교사들은 더욱 코로나 바이러스의 부담감에 시달렸다. 그런 탓인지 우리 반 담임교사와 보조교사들도 어떻게 해서든 백신 접종 예약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다. 그런 동료들을 바라보며 나 또한 바이러스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들처럼 백신을 맞기 위해 전투적으로 노력할 만큼 백신에 대한 신뢰도 들지 않았다. 백신의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기사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다. 그래서 호들갑을 떨며 새벽에 일어나 예약이 된다는 사이트를 찾아 나서고 예약이 되는 곳을 수소문하느라 분주한 동료들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그러던 중 매일 수십 명의 아이들을 마주해야 하는 교직원들을 불쌍히 여겼는지 교육구에서 특별 백신 접종 기회를 제공했다. 교육구에서 보내온 백신 우선 접종 코드를 정해진 시간에 백신 신청 웹사이트에 입력 시 접종 예약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혜택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일일 접종 숫자가 제한되어 빨리 코드를 넣어야 예약이 가능한 경쟁적인 시스템이었다. 처음 교육구 이메일로 백신 코드가 도착한 날, 해당 사이트의 시스템의 에러나 날 정도로 소동이 있었다. 결국 실망한 우리 반 동료 보조교사들은 알아서 기회를 찾아내었고 담임교사와 보조 교사 한 명은 마침내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이지만 접종을 받을 수 있는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주에 교육구에서 다시 코드를 보내주었고 여전히 의구심을 가진 나는 '되면 좋고 안 되면 나중에 맞자'는 심정으로 클릭을 했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예약이 되었다. 나의 클릭 속도가 이렇게 빨랐나 싶어 예약되었다고 뜬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예약한 사람들과 예약을 못 한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고 여전히 망설이던 나는 남보다 일찍 백신을 맞게 해 준다는데 맞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드디어 내가 백신을 예약한 날이 되어 백신 접종 장소로 지정된 고등학교의 체육관으로 갔다. 안내요원에게 신분과 소속 확인을 받고 사전 질문을 통해 건강 상태를 확인한 후 잠시 대기했다가 접종을 받게 되었다. 체육관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접종을 받은 이들도, 받으려고 대기하는 이들도 다들 빠른 클릭으로 예약을 해서 백신을 맞게 된 것에 대해 뿌듯해하고 있었다. 잠시 따끔한 순간이 지나고 접종 후 상태 확인을 위해 15분을 기다렸다 체육관을 나서는 내 손에는 2차 접종 예약 일시가 적힌 카드가 들려있었다.
갈 때는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과 다소 불안한 심정이었는데 백신을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남들보다 특혜를 누린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호강에 겨웠구나' 싶어 예약을 못한 동료들과 백신 접종을 애타게 기다리는 지인들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코로나 시대에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럽고 힘들었는데 이런 혜택을 받고 보니, 그 어려운 사정을 누군가 알아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학교에서 일한 덕분에 그리고 클릭을 빠르게 한 덕분에 먼저 백신 맞는 호사도 누려본다.
조만간 누구나 백신을 맞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찬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백신을 맞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애타게 할 만큼 백신 접종의 진행 속도는 느리다. 백신을 맞는 것도 불안하고 안 맞을 수도 없는 불안한 코로나 시대이지만 많은 이들이 백신 접종 후 지금보다는 자유롭울 코로나 이전의 삶의 회복을 기대하며 백신 접종을 바라보고 있다.
남의 신분을 도용해 노령층 대상 접종을 받으려다 붙잡힌 어느 20대 미국인들에 대한 뉴스나 지인의 권력을 이용해 먼저 접종을 받은 것이 들통나서 지인의 신세까지 망친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나에게 찾아온 백신 접종의 기회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생각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내가 가족들 중에 1번 타자로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며 속 없이 깔깔댔지만 백신 맞고 몸은 괜찮냐고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들 재택근무하는데 어쩔 수 없이 현장에 나가 일해야 하는 참 안 된 남편의 백신 맞아서 좋겠다는 농담에도 미안했다.
몇 주 후 2차 접종을 받으러 가야 한다. 2차 접종 후유증이 심하다니 잘 먹고 건강관리를 잘해서 별 일 없이 백신 접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두가 백신을 맞을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백신 만으로 바로 해결될 것이라 볼 수 없는 코로나 시대가 얼른 종결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