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국 책 읽기
얼마 전 영화를 소개하는 유튜브에서 본 '오베라는 남자'의 번역서를 도서관 책꽂이에서 발견했다.
한국 저자의 책이 아닌 스웨덴 작가의 책을 번역한 것이지만, 잠깐 유튜브를 통해 본 영화의 주인공 심술쟁이 괴짜 할아버지가 책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책을 빌렸다.
프래드릭 배크만, 「오베라는 남자」 , 다산북스, 2015
고양이는 자기가 되던질 나막신을 안 가져왔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몇 초 뒤 오베의 집 현관문이 홱 열렸다. 마치 문이 열리지 않을 경우 오베의 몸이 문을 뚫어버릴까 두려운 나머지 저절로 열린 것 같았다.
세 번째로 초인종이 울리자 오베는 구멍을 뚫는 걸 멈추고 문을 노려보았다. 바깥에 누가 서 있든 정신력만으로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는 듯. 잘 안 됐다.
그 말에 그녀가 웃자 오베가 방어 태세를 취했다. 탄산음료를 너무 빠르게 따르는 바람에 사랍에 거품이 넘치기라도 하듯.
폭력적이지도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게. 그저 부드럽고 단호하게, 마치 그 손이 자기 손이 아니라 시의회의 컴퓨터 센터에 있는 로봇이 조종하는 손인 양.
블로그에 올린 오베라는 캐릭터에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책을 내게 되었다는 프래드릭 배크만의 첫 책인 '오베라는 남자'의 독특한 점이 이런 묘사들이다.
글씨를 통해 오베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인데도 작가가 묘사한 배경이나 인물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으로 그려질 듯 다가왔다.
작가의 독특하고 구체적인 인물의 심리에 대한 묘사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 사이사이에서 만나게 되는 작가의 유머에 웃음이 터지곤 했다.
불우했던 성장과정을 지났음에도 지켜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원칙주의자로 살았던 주인공 오베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준 아내 소냐와 함께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소냐를 잃은 뒤, 더 폐쇄적이고 외골수적인 원칙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위 사람들에게 심술쟁이로 비치는 삶을 살았다.
직장에서 권고 퇴직을 당한 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내를 만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데, 새로 이사 온 유쾌하고 엉뚱한 임산부, 파르바네로 인해 그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된다.
유연함과 자유주의로 포장된 세상의 변화로 빚어진 그릇된 타협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지배하는 세상과 결코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던 오베의 삶에 뜬금없는 폭탄이 던져진 상황이 된 것이다.
폭탄처럼 그의 삶에 뛰어들어온 새로 이사 온 이웃 여자와 그 가족으로 인해 오베에게는 오랜 세월 소원하게 지낸 이웃들과의 만남이 어어지게 된다.
그 우연한 만남과 그를 귀찮게 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소한 사건들은 오베의 자살을 무한 연기하게 만들고 오베의 삶은 좌충우돌의 길로를 걷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자살 계획의 일탈을 만들어가는 관계와 사건들은 오베의 쓸쓸하고 외로웠던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다시는 맛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삶의 기쁨을 선사해준다.
이 책 또한 늘 건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보여주는 조금은 빤해 보이는 전개로 이어지지만, 오베라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주인공과 각양각색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프레드릭 배크만은 그 만의 방식으로 유쾌하고 즐겁게, 가끔은 가슴이 따끔거리도록 전개해 나간다..
내 옆집에 살았다면 몹시 피곤한 이웃이었을 오베를 직접 만나보고 싶을 만큼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오베의 매력에 빠졌다.
피곤하기는 해도 그가 하는 말은 다 옳았다.
귀찮기는 해도 그의 원칙에는 잘못된 것이 없었다.
아마도 오베와 같은 사람이 더 많았다면 이 세상은 조금 천천히 발전했을지도 모르지만 더 선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졌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다 읽고 영화를 보고 싶어 도서관에서 목록을 검색하여 "A Man Called Ove" DVD를 빌렸다.
Play 단추를 누르니 오베 아저씨가 난생처음 듣는 스웨덴어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스웨덴어로 제작된 영화의 하단에 영어 자막이 나왔지만 자막을 읽기도 전에 화면이 바뀌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책을 미리 읽은 데다가 친절한 유튜버의 영화 설명을 본 기억이 있어 적당히 이해할만했다.
좋은 영화라고 설득하여 영화를 같이 보기 시작한 두 아이들이 지루함에 딴짓을 하다 슬금슬금 자기들 방으로 가 버려서 결국 혼자 영화를 보았다.
항상 책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던, 책과 다른 각색과 편집의 묘미도 느끼면서 책에서 맛본 잔잔함 감동을 다시금 맛보는 시간이었다.
세상에 동화될 수 없었고 변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았던 오베라는 남자의 인생은 요즘처럼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인 능력이 되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는 나에게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베와 소냐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애틋함과 책임감에 대해, 간섭과 오지랖처럼 느껴질 정도의 극성스럽게 삶에 개입하는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과 영화였다.
인생의 원칙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미가 희미해지는 요즘, 특별히 삶의 부대낌보다는 디바이스를 통한 관계와 접촉이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진 시대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잡상
오베는 차 가격을 거의 8천 크로나나 깎고 그 가격에 겨울용 타이어까지 받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나마 이런 조건으로 도요타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베가 대리점에 갔을 때 그 빌어먹을 꼬마는 현대차를 보던 중이었으니까. 하마터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헉~ 샤브의 열혈 팬인 오베를 통해 작가는 현대차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미국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처럼 스웨덴 작가도 현대차는 도요타보다 못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야기의 이 부분을 읽는 동안 기분이 언짢았다.
내가 현대차의 열혈팬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내 나라 차라고 현대차에 대한 푸대접이 담긴 작가의 문장에 평소에는 잊고 있던 애국심이란 것이 솟아났나 보다.
그 푸대접이 별로 비중 없이 지나가는 소설 속의 한 문장이었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