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먹는 것은 바로 '나이'입니다.
성장을 의미하던 나이 드는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는 늙어가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장이 멈춘 어른들은 바로 그 늙어가는 나이를 먹게 됩니다.
날마다, 매시각 늙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평소에는 잊은 듯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또는 사소한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내가 늙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늙었나 보다'라는 생각에 화다닥 놀라는 순간들.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바늘귀야, 어딨니?
돋보기 쓴 낙타가 말한다.
"천국에 오라는데 천국 가는 바늘구멍이 어딨어?"
바늘구멍이 콧구멍 만하게 커도 이제 구멍이 안 보여서 천국에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성경의 마태복음 19장 24절에 보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을 마주칠 때면 생각했다.
'등에 커다란 혹이 두 개나 있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렵겠다. 천국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사 년 전 봄, 영어 소설 읽는 모임에서 책을 펼쳤는데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눈이 피곤한가 싶어 눈을 꿈뻑이며 힘을 주니 글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불빛이 조금만 흐릿해도 글씨가 잘 안 보이더니 급기야 휴대전화의 카톡이나 이메일을 읽기가 어려워졌다.
동갑내기 친구가 설정한 커다란 카톡 글씨 크기를 보며 할머니냐고 놀린 게 불과 서너 달 전인데, 카톡을 읽거나 보내려고 해도 글씨가 뿌옇게 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결국 나도 그 친구의 카톡 글씨만큼 크게 설정을 바꿨다.
글씨가 커진 카톡과 이메일을 보니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그런데 여전히 책이나 우편물을 볼 때면 팔을 최대한 뻗어야 겨우 눈에 들어왔다.
그 무렵 바느질을 하려면 바늘에 실이 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구멍이 콧구멍만 하게 보였다면 점점 구멍이 참깨만 하게 보이더니 급기야 바늘에 바늘귀가 없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에 이르렀다.
딸이나 아들에게 바늘귀에 실을 좀 꿰어 달라면 아무 소리 없이 해주면 될 것을 그걸 왜 못하냐며 투덜대며 대충 껴주고 가버렸다.
그 모습에 내가 우리 아이들 나이였던 시절, 엄마가 실 좀 껴달라며 바늘과 실을 내밀면 귀찮아서 퉁퉁거리며 한 마디씩 했던 기억이 뾰족하게 마음을 찔렀다.
결국, 근처 안경원에서 돋보기를 맞췄다.
돋보기를 쓰자 글씨는 시원스레 잘 보였지만 고개를 들고 벽에 걸린 시계라도 보려면 안경을 벗어야 했다.
아, 예전에 동네에서 아줌마와 할머니 사이의 나이쯤 되는 사람들이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며 책이나 잡지를 보는 걸 보고 킥킥거리던 시절의 철없음이여!
내가 시청이나 동사무소에 비치된 돋보기를 쓰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처지가 될 거라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철부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켓에서 장 볼 때 돋보기 없이는 상품의 설명서도 읽을 수 없어 휴대전화에 돋보기 앱도 깔았다.
아, 바늘구멍이 콧구멍만 하고 내가 코딱지만큼 작아도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구멍을 찾을 수 없는 신세가 되어, 감사하게도 천국에 들어오라는 말을 들을지라도 훌쩍 구멍을 지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젊은 눈을 가졌던 시절에는 낙타가 혹이 두 개나 있는 커다란 녀석이라서 바늘구멍으로 못 들어가는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해야 되는 처지가 되고 보니 어쩌면 낙타 눈에 바늘구멍이 보이지 않아서 들어갈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바늘구멍이 보이지 않으니 낙타는 구멍을 찾을 수 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것은 바늘귀를 맨눈으로 보던 시절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바늘구멍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서야 내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바늘구멍 만하게 몸을 낮추고 허세와 욕심의 크기를 줄여야 할 뿐 아니라, 내가 지나야 할 제대로 된 구멍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 안목 와 분별하는 삶의 지혜까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 앞에 있는 것도 분간 못하면서 천국으로 가는 구멍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눈이 나이를 먹어서야 나는 세상을 좀 더 잘 보게 되었나 보다.
미안한 표정으로 바늘과 실을 내밀던 엄마의 마음도,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던 아줌마들의 사정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비치된 돋보기에 의지해야 몇 자 적을 수 있는 처지가 언제든 내 신세가 되는 것처럼 나이를 먹으면 예상치 못한 슬픈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오늘도 브런치에 몇 자 적기 위해 돋보기를 찾아 끼면서 내가 눈과 함께 늙어가고 있음을 화들짝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