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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May 08. 2020

아이가 엄마보다 똑똑해지면, 엄마는 어쩐지 서운하다

비타민 학설에 대해 아들과 언쟁을 치른 한 엄마의 고백

드라마에 나온 대사처럼,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길어져도 여전히 서툽니다.

서툰 엄마로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특별한 순간들

아이 때문에 행복한 순간과 엄마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순간들을 이야기합니다.




겨울의 끝자락 즈음에 감기 기운이 있다는 두 아이에게 감기 초기에 비타민을 듬뿍 먹으면 효과가 있다며 먹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비타민을 먹는 딸을 보던 아들이 갑자기 비타민을 먹을 필요가 없다면서 자신은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몇 주전만 해도 코가 맹맹 거리기에 비타민을 쥐어주니 아무 말 없이 삼켰던 아들이었다.


아들은 비타민은 음식으로 충분히 섭취가 가능하고 그 정도면 몸을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며, 예전에 비타민의 효능을 주장했던 과학자도 결국 암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비타민을 약으로 먹는 것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거라며 어디서 들었는지 자기가 아는 것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먹어보니 도움이 되고 다들 효과가 있더라는 내 얘기에 누가 그랬냐고 물었다.

엄마 친구도 먹고 좋았다더라, 학교 동료도 도움이 된다더라.... 그리고 또 누구 엄마가...

아들이 헛웃음을 웃고는 다시 내 말에 반박을 하기 시작했다.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마구 반박을 쏟아내는 아들과의 언쟁 끝에 나는 전혀 맥락 없는 소리를 빽질렀다.

"아프던 말던 네 맘대로 해. 아프면 너만 손해지. "

결국 비타민을 먹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들 등에 대고 한 마디 더 보탰다.

"너 그러다가 아프다고만 해봐라. 응!"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엄마표 억지소리였다.


비타민을 먹은 딸도 먹지 않은 아들도 이삼일 뒤 감기 기운을 떨쳐냈다. 


며칠 뒤, 딸이 컨디션이 안 좋다기에 비타민을 챙겨주는 나를 본 아들은 또 비타민 섭취 무용론에 대한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몸에 좋다는데 먹어서 나쁠 게 뭐냐는 내 말에 아들은 그렇다고 굳이 먹을 이유도 없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시 비타민 논쟁이 벌어졌고 나는 먹기 싫으면 먹지 않으면 될 것을 엄마를 꺾어보려는 아들이 괘씸했고, 아들은 나의 억지스러운 고집을 그냥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엄마표 논리의 허점을 찾아내어 엄마를 이겨보고야 말겠다는 듯 뒤로 물러서 주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난 엄마가 주제와 상관없이 아들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에 대해 잔소리를 하였고, 이에 화가 난 아들이 방으로 들어가면서 비타민 논쟁은 끝이 났다.




이제는 논리나 지식으로 아들을 당해낼 수가 없다.

만날 핸드폰과 컴퓨터만 붙들고 사는 아들이 가진 미국 정치와 세계정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한국 뉴스와 인터넷 기사 또는 카톡의 카더라를 통해 접하는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각종 유튜브와 듣도 보도 못한 인터넷 사이트를 종횡무진하는 아들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과 수준을 드라마와 연예소식을 주로 보는 엄마는 쫓아갈 수 없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엄마의 어설프고 허술한 본질을 파악하고 은근히 엄마를 무시하던 아들은 이제 대놓고 엄마를 이겨버리는 십 대가 되어버렸다.


비타민 언쟁 후, 울상을 짓는 엄마를 본채 만채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 열다섯 살짜리 아들이 얼마 후 방에서 나왔을 때, 패자의 심정이 된 엄마는 말했다.

"엄마가 최고인 줄 알고 '엄마, 엄마'하며  따라다니던 다섯 살 때 아들은 어디 갔나. 그때 아들은 엄마가 하는 말을 무조건 믿어줬는데. 다섯 살 아들이 너무 그립네."


사실, 그때 나는 다섯 살 아들이 그리운 날이 올 줄 몰랐고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된 것이 서운해질 것을 몰랐다. 

아들이 얼른 크길 바랐고, 빨리 자라길 기다렸다.


다섯 살 때 아들은 울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줄 거란 엄마의 협박에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참고, 밥을 안 먹으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는 말에 엄마 손에 들린 숟가락의 밥을 억지로 받아먹던 순진한 꼬마였다.

그땐 다섯 살 아들이 그리운 날이 올 줄 몰랐다.  

키가 크려면 콩나물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얼굴을 찡그리며 콩나물을 삼키고, 편식하면 나쁜 아이라는 말에 착한 아이가 되려고 코를 잡고 당근을 먹던 착한 다섯 살 짜리였다.

열다섯 살 먹은 아들은 엄마의 말과 정보에서 틀린 것들을 찾아내고 엄마의 잔소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아내어 조목조목 따지는, 세상 물정 다 알고 스스로 사리분별이 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전설이나 설화처럼 얼도 당토 않은 엄마의 엉터리 이야기와 근거 없는 잔소리가 세상의 진리인 줄 알고 순진하게 믿어주던 그 시절 아이가 나는 몹시 그리웠다.

엄마 편의대로 지어낸 허술한 협박과 과학적 근거를 대기 어려운 엄마표 상식이 다 옳은 것이려니 받아주던 어린 아들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아서 어쩐지 서운했다.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자기 만의 방식으로 습득하는 세상에 사는 아들은 이제 내가 이길 수 없는 똑똑한 사람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아들이 내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깨우치지 못한 수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하는 십 년 동안 나의 지식과 정보는 여전히 아들이 다섯 살이었던 때와 같은 수준으로 머물러있는 기분이다.

어쩌면 나의 십 년 전 지식과 정보가 이제는 세월과 시대의 변화에 퇴색되고 변색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배운 것을 잃어가는 십 년 동안 아들은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흡수했고, 열다섯이 된 아들은 이제 엄마가 진리였던 세상에서 한 걸음씩, 어느 날은 열 걸음씩 멀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시절 내가 그러했듯 이제는 대놓고 엄마를 무시하려 드는 십 대가 되어버렸다.

엄마의 잔소리에는 논리와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엄마에 대해 우월감을 느꼈던 그 시절을 나 또한 지나왔으니 아들의 시절 또한 한동안 그러할 것을 안다.  

앞으로 아들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만큼 배우며 가고 싶은 만큼 더 멀리 갈 것이고, 아들과 나의 논리와 지식의 차이는 점점 커질 것이다.




다섯 살 꼬마는 엄마의 말을 다 믿었고 엄마의 말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가 하는 말은 다 옳고 엄마의 말대로 하면 잘못되는 법이 없다고 믿었던 날들은 아이의 인생에서 금방 지나갔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억지 잔소리가 아들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아들은 나에게 설득당하거나 무엇인가를 배우기보다, 나를 설득하거나 가르치려 들 것이다.

내가 아들 나이이던 시절 더 이상 엄마가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세상의 것들을 맘껏 받아들이며 뻗어나갔던 것처럼 그 날이 오면 아들은 나를 떠날 것이다.


그리나 어쩌면, 언젠가는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의 양이 삶에서 배운 지혜의 양이나 깊이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엄마만큼 나이를 먹은 후에는 엄마의 말이 옳더라는 깨달음에 삶의 어려움을 만날 때면 제일 먼저 엄마를 떠올리는 것처럼 언젠가는 나를 찾아와 의견을 구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직관과 지혜가 담긴 잔소리가 세상의 진리였던 다섯 살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이 먹는다고 다들 통찰력과 지혜를 가진 어른으로 늙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식과 논리는 딸리더라고 지혜와 직관을 가진 엄마로 나이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아들이 다섯 살 때처럼 다시 내 앞에 달려올 때, 그 아이의 삶과 마음을 보듬고 다독여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인생은 그런 모양이다. 

자신이 진리이자 전부라 믿었던 존재가 그다지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 더 큰 세상을 만나게 되고, 그 세상을 실컷 맛 본 후에는 대단치 않았던 존재에게서 숨겨진 가치를 다시 깨닫기도 하는.


아이들이 돌아와서 찾을 만한 가치를 가진, 그런 엄마로 늙어가고 싶다.

그때가 되면 다섯 살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열다섯 살 아들에 대한 서운함을 떠올리며 그저 빙그레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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