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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Apr 18. 2020

십팔 년을 엄마가 처음인 엄마로 살고 있다

엄마여서 경험하는 특별한 감정이 찾아오는  어느 순간 이야기

드라마에 나온 대사처럼,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길어져도 여전히 서툽니다.

서툰 엄마로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특별한 순간들

아이 때문에 행복한 순간과 엄마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순간들을 이야기합니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할 큰 딸을 둔 엄마가 되었는데도 나는 엄마로서 여전히 서툴다.


얼마 전부터 잘 챙겨서 하라고 한 것을 딸이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라도 하면 되지만 못마땅한 감정이 치미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딸 : 엄마 있잖아. 이게…

엄마 : 뭐? 아직 안 했다고? 지난번부터 하라고 했잖아.

딸 : 알아. 나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됐다고.

엄마 : (도끼눈을 뜨고) 넌 어째 말로만 한다고 하니. 응?

점점 작아지는 딸 앞에서 점점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커지는 엄마는 금세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이 화가 치솟아 오른다.



<이어지는 상황 >


딸 : 엄마, 미안해.

엄마 : 으이그~ 너는 어째…… 만날 말 뿐이지. 응!  (험한 말이 나오려는 것을 이성을 되찾으며 꿀꺽 삼킨다) 알았으니까 가서 할 일이나 해!


문소리도 나지 않게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는 딸을 등 뒤에서 느끼면서 화를 삭이느라 엄마는 공연히 더 그릇을 달그락 거리며 설거지를 한다.  

여기서 끝나고 마무리되면 다행이다.


그러나 엄마의 감정의 잔재는 방에서 나온 아이를 마주하자 다시 꾸역꾸역 올라온다.

엄마  :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응?

딸 : 하려고 해.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엄마  : 뭘 몰라.  그 뻔한 걸 몰라?

딸 : 엄마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나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고.

엄마 : 뭐? 뭘 너만 힘들어? 다들 하는 거를.

딸 : 미안하다고 했잖아. 엄마가 내 맘을 알아?

딸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엄마 : 만날 말로는 알아서 한다고 하고... 어째 제대로 하지를 못하냐고? 알아서 한다면서?

사라진 딸의 뒤통수에 대고 아직 풀리지 않은 못마땅한 마음을 집어던진다.


그러나 설거지가 끝날 무렵 엄마는 점점 후회와 자기반성의 늪에 빠져 우울해진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결혼하고 한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다.

너무도 감사하게 뱃속에 아이가 생겼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엄마가 되면 좋을지 생각하며 육아 관련 및 자녀교육 관련 서적을 참 많이 읽었다.

그런데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린 지 열여덟 해가 되고 있는 지금, 나는 아직도 육아와 자녀교육 관련 서적을 읽던 때의 모습처럼 여전히 서툴고 어설픈 엄마가 되곤 한다.

심지어 내가 아이를 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엄마라는 사람이 맞는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곧바로 아이에게 화를 내고, 그 화를 삭이지 못해 결국 내 분노에 내가 휘둘려 굳이 하지 말아도 될 말을 내뱉는다.

화라는 것이 신기하게 한 번 일어나기 시작하면 화가 화를 부르는 형국을 만든다.

화를 내다보면 내가 혐오하던, 모질고 변덕스러우며 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못난 엄마가 되어 있다.

게다가 어느 순간 나의 화가 타당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자각되면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몹시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서  나를 화난 사람이라는  비이성적 상태로 만든 책임이 아이에게 있다는 생각에 어느새 나는  아이에게  더 화를 내고 있다.  

넘치도록 실컷 아이 맘이 아픈 소리를 내뱉고 나서 그 감정의 소용돌이가 사그라질 무렵,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결국 돌아서면 바로 후회할 그런 감정에 휩싸여 굳이 보이지 않아도 될 원초적인 모습을 보인 여전히 어설프고 서툰 엄마라는 것에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냥

“그랬니? 앞으로는 잘 하자.”라든가

“저런, 그랬구나.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라는 말로 대꾸를 했어도 이미 아이는 미안함을 가졌을 것이고 반성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아이가 미안함을 넘어 죄책감을 갖거나 원망을 하도록 몰아붙이고 있다.

 



아이에게 억지 사과를 받고 내가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아이에게 모난 소리나 던진 모질고 못난 엄마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만 것이다.

아이가 잘못한 것보다 그것에 대해 과민하게 화를 낸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마음이 상한 나는 언짢은 내 기분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아이에게 사과의 문자를 보낸다.

이미 늦은 것을 알면서.

그럴 때면 나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진 아이 "아니야. 엄마, 내가 미안해."라는 답을 보내준다.

아이의 문자에 코끝이 시큰해진다.


아이의 맘이 상한 만큼 자괴감이 깊어지는 밤.

내일은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본다.

이미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는 아이에게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며 안아줄 수 있는, 십팔 년 전 육아서적이나 자녀교육서적에서 보았던 그런 성숙하고 너그러운 엄마가 될 거라는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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