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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Dec 31. 2020

아뿔싸! 나도 관종이었다.

정도는 다를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언제부터인가 일상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관종이라는 말을 하거나 들으며 살고 있다.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이 많아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의 잊어버린 파워 포인트 프로그램을 다시 배우면서 몰랐던 기능을 알게 되었다. 연말을 맞아 배운 것을 써먹어 볼까 싶어 간단한 영상으로 E-Card를 만들어 그룹 메신저에 올렸다. 그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휴대전화 옆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건만 도통 반응이 없었다. 지인과 학생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화는 아니더라도 뭔가 특별한 반응을 기대했던 탓인지 나는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마도 내가 만든 영상이 여기저기서 떠도는 것 중 하나를 보낸 것인 줄 알고 보지 않고 넘긴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그룹 메신저에 수시로 올라오는 다양한 영상에 나도 첫 그림만 보고 적당히 대꾸를 하거나 소위 말하는 눈팅만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궁리를 하다가 얼굴에 철판을 깐 심정으로 어디서 퍼온 영상이 아니라 우리 사진을 넣어 만든 것이니 꼭 봐달라고 톡을 올렸다. 그러자 제대로 안 보고 지나쳤다는 지인과 학생들의 '좋다', '감동적이다'라는 답글이 달렸다. 그러고 나니 꽁하게 움츠러들었던 마음의 주름이 펴졌다. 슬그머니 주름이 펴진 마음을 정돈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꽁하고 이마를 치는 느낌이 들었다.


아! 나 관종인가?  


여러 가지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특이하다 못해 기이하고 남들과 다른 언행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체에 오르내리던 이들에게 관종이라고 비웃음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든 구독자와 조회수를 늘리려고 비상식적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를 보이는 이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들과 다르다고 착각했던 나에게도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그네들을 닮은 다른 이의 관심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어쩌면 꼭꼭 숨겨놔서 나 조차도 몰랐지만 나는 잠재적인 관종이었을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관종'을 검색하니 이렇게 나와있다.

관심병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병적인 수준에 이른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타인에게 관심을 받을 목적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작성하거나 댓글을 달고, 이목을 끌만한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증세가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에는 ‘관심 병자(關心病者)’, ‘관종(關種)’, ‘관심 종자(關心種子)’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심병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브런치 작가가 되어 얼마간 기새 좋게 글을 써 갈 때만 해도 나는 내 글이 세상에 작은 파동은 일으키는 의미 있는 글이 될 거라 착각했었다. 그러나 나의 문장력과 글과 생각의 깊이는 작은 파동조차 일으킬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브런치를 그저 일상의 소소한 생각과 느낌, 글로 담고 싶은 것들에 대해 몇몇 인심 좋은 이웃들과 수다를 떠는 동네 찻집 같은 것으로 여기기로 마음 먹었다.  

한국어 교사로 미국인들과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수업에 활용하거나 복습용으로 활용할 적당한 동영상이 없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직접 동영상을 만들어 학생들이 수시로 볼 수 있게 유튜브에 올려보기로 했다. 남들이 다 알고 난 후에야 뒤늦게 신문물을 접하며 살아온 탓에 새로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대단한 유튜버들의 비디오를 보며 동영상 만드는 방법과 유튜브에 대해 한 걸음씩 배워가며 영상을 올리기 시작을 했다. 더듬더듬 그렇지만 열과 성을 다해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건만 반 학생과 지인 몇 외에는 아무도 내 영상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작할 때는 영상을 만드는 새로운 도전으로 열에 들떠있었으나 어느새 나는 조회수와 구독자가 오르지 않는 유튜브 채널에 대해 그리고 내 영상에 대해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와 락이 빠진 '노와 애'만 느끼는 초라한 유튜버가 되어버렸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난 후 지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유튜브를 무료로 대여받은 수업 자료 창고로 여기고 있다. 시대의 조류에 뒤지지 않고 영상의 시대에 영상을 만드는 교사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말이다.


브런치와 유튜브를 시작하고 내가 다른 이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구독과 좋아요를 갈구하는 잠재적인 관심병자였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지금은 인정에 안달하는 단계를 벗어났지만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나는 관심과 주목을 받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며 살았다. 어릴 적 발표하겠다고 손을 든 것도 아닌데 선생님의 지목을 받으면 손발이 덜덜 떨리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제일 싫었던 순간이 반 친구들 앞에서 음악 실기시험을 치르는 시간이었고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멀리 뛰기나 무용 실기 시험을 보는 날은 하루 종일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관심과 주목이 싫어서라기 보다 내가 못하는 것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노래를 잘 불러서 탄성을 받는 친구나 학예회에서 나비처럼 춤을 추는 친구들이 몹시도 부러웠던 것을 보면 말이다.

처음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라는 것을 접했을 때, 그 신문물이 신통하고 신기하면서도 내가 올린 톡에 휴대전화가 침묵할 때면 소외감과 서운함이 밀려왔다. 실상 아무도 나를 소외시키거나 일부러 멀리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종종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런 기분 탓에 나의 에너지와 감정을 소모하게 만드는 SNS를 멀리하며 지냈다. 아마도 관심병이 깊어질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관심병이라 불릴 병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도는 다를 수 있어도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다른 이들의 인정을 통해 자신감과 자존감이 성장하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서 얼굴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온라인을 통한 소통이 늘어나면서 관심과 인정을 주고받는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 아마도 그런 탓에 과거와는 다른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사람들의 관심병이 깊어지고 관종이라는 새로운 종족도 생겨난 것 같다. 사람들의 애정이 나를 향하지 않을까 봐, 내가 관심의 대상에서 소외될까 봐 두려워서 인정을 갈구하며 댓글과 구독자 그리고 좋아요에 '희로애락'하는 노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태어나자마자 울면서 부모의 애정이나 주변 사람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관심병 세포를 가지고 태어나는 듯하다. 성장 배경과 환경에 따라 관심병 초기에서 관심병 중기나 말기로 병이 퍼지기도 하고 병이 깊어지기 전에 스스로 다독일 수 있는 면역력을 갖게 되는 것이 다른 것뿐이다. 잠재적인 관심병자로 살면서 관종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관심과 애정을 주고받는 일일 것이다. 모두가 관심병에 면역력을 가진 건강한 세상이 된다면 언젠가 '관종'이라는 말도 추억의 옛말로 남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을 마주하는 시간보다 스크린을 마주하는 시간이 몇 배는 더 길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 이마를 치고 지나간 돌멩이를 통해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나도 관종일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관심과 인정으로 기분이 희희낙락했다가 금세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히는, 다른 이의 따뜻한 애정이 필요한 사람이다. '좋다', '감동적이다' 그 작은 마음 한 조각이면 충분한 아주 쉬운 사람이다.


여전히 바이러스로 인해 조금은 어둡지만,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다짐해본다. 관심을 감사히 받되 인정에 병적으로 희로애락 하지 않는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자고. 그리고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이들에게 내 마음 한 조각쯤은 마구 퍼주는 사람이 되자고.

일단 내 카카오톡 리스트에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연말연시 인사말을 보내주자. 물론 '이 사람 뜬금없이 왜 이래?'싶지 않은 선에서. 나는 건강한 관심병 면역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사진 출천 : Pixabay.com - lukasbi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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